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오늘은 이사야 7장11절에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에서 "징조(徵兆)"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먼저 "징조" 라 하심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 일을 알 수 있도록 미리 보여지는 조짐이나 낌새 같은 것을 말하며 이사야가 유다 왕 아하스(3~4절)에게 이르기를 하나님께 한 "징조" 를 구하라고 하신 이유는 아하스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하나님은 잊어버리며 그 훈계의 말씀을 등 뒤로 던져버리고 여러 우상숭배를 하며 제사하고 분향하였으니 이는 아하스 뿐만아니라 다윗 이후로 머리(왕)부터 발끝(백성)까지, 즉 역대 왕들로부터 그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죄와 악을 행함(예레미야 32장32절)으로 하나님의 눈을 촉범(이사야 3장8절)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들이 돌이켜 고쳐 행하기를 바라시고 북이스라엘 열왕들로, 에돔 족속들로, 블레셋 족속들로 남 유다를 치게 하였으나 오늘 본문의 말씀의 바로 뒷 구절 12절에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하고 쓰고 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지 않았으니 아하스가 징조를 구하지 않고 구하지 못했던 까닭은 아하스가 왕으로써 그 유다 백성(자녀,성도)들을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하고 오히려 사지로 몰아 죽게 만들고 그러한 위기에서 그 백성들을 구하지도 못하는 무능한 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그 왕의 자리에 대한 욕심과 높은 마음이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로 막았으리라.....
그래서 14절에 "~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징조를 보이셨으며 하지만 그 징조가 나타나기까지는 유다 왕 아하스 이후로 자그마치 8,900년이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였으며 그 징조는 잘 아시는 바 임마누엘 곧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구원자" 시요 그러한 의미에서의 "유대인들의 왕" 이신 "그리스도(마태복음 1장21~23절)" 로 나타났으며 그는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함으로 죄와 악에 사로잡혀 죽음(사망,패망,멸망)의 사지로 자기 자신들을 몰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하는, 즉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시고 전하셨으니 여기에서 한 가지 아셔야 할 것은 세상에서 사람이 제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내는 의인이요 영웅이라 칭함을 받는다 할지라도 정작 자기 자신의 목숨(생명)은 죽음의 기로에서 섰을때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건져내지도, 구하지도, 구해내지도 못한다면 그러한 칭호가, 그런게 다 무슨 소용이며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라며 먼저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죽었다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 생명을 죽음에서 구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목숨을 죽음에서 구한 후에야 다른 사람들이 보고 따라오게 하는 것이 순서이며 그렇기 때문에 진정 구할 수,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가르치고 전하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몸소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기를 죽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뜻(계명과 법도)과 마음을 지켜 행하심으로 본(本)을 보이셨으니 이는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 또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임마누엘) 그 증거로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우리들 역시 그리스도가 보이신 그 본과 자취를 좇아 행하여야 하며 이러한 류가 아니고선 그 어떤 것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보호할 수도 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하며 또한 이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두 번째 다시 오실 것에 관하여 징조(마태복음 24장3절~ )를 보여 주신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라는 것을 잡아 내셔야 하며.....
그리고 그러한 징조에 대하여 말씀(예언)하시고 그 이후로 2000년이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그러므로 누가복음 12장54~57절에 "~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하는 것처럼 세상에서 표현하는 말로 "눈치가 백단.", "능구렁이가 다 되었다." 하는 말도 있듯이 세상 모진 풍파 다 겪으면서 살아오니 이제는 "쿵" 하면 "짝" 하며 잘 알고 잘 헤아릴 정도가 되었는데도 정작 무엇이 참으로 옳고 어떤 것이 참으로 올바른 것인지 그러한 징조나 조짐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둔하고 얼마나 감각 없는 것인지를 생각하셔야 하며 고린도전서 2장11절에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하시면서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쉽게 말해서 어렵고 힘들고 괴로운 상황에 처해 본 사람은 그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을 충분히 헤아려 이해할 줄 알아 좀더 너그러워지고 관대해지는 것처럼 진정 하나님께로 나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진정한 뜻과 마음을 알찌니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은 헤아려 이해할 줄 알아 좀더 너그러워지고 관대해졌다 할지라도 지금 당장 자신의 눈 앞에 보이는 유익(욕심)이나 이익(높은 마음) 앞에 서면 너그러움이고 뭐고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 자신이 살기 위해서 상대편을 비방하고 훼방하며 다투면서 미워하고 사나워져서 함부로하는 죄와 악을 행하게 되니 알고 있으나 안다고 할 수 없으며 볼 수 있으나 본다고 할 수 없으며 진정 사는 길, 즉 자신의 목숨(생명)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 구하는 길은 지금 당장은 미련스러워 보이고 답답해 보여도 영(靈) 곧 정신 세계을 깨워 그리스도가 보이신 본을 좇아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높은 마음을 비우고 사나운 성정을 죽여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그리스도의 마음(빌립보서 2장3~5)으로 상대편의 처지나 입장이나 상황을 충분히 헤아려 이해하여 배려할 줄도 양보할 줄도 아는 것임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