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마태복음 22장32절)
오늘은 마태복음 22장32절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에서 지난 시간에 이어 두 번째로 "이삭"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이야기 하기에 앞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관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현존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의 인물들임과 동시에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 속의 인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이스라엘 역사나 또한 더 큰 비중을 두고 성경의 역사로만 볼 수 없는 것은 첫 번에 오셨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도 아브라함의 때에 있었던 일들을 그의 제자들이나 그를 좇는 유대인들에게 가르치며 전하였으며 그리스도의 흔적(갈라디아서 6장17절)을 가진 사도 바울 또한 아브라함에 관하여, 이삭에 관하여, 야곱에 관하여 여러 바울 서신서에서 기록하고 있으니 이는 시간만 흘렀을 뿐, 공간만 바뀌었을 뿐 그 때나 지금이나 거기나 여기나 별반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이는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어떤 성경 지식을 쌓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의 하늘의 지혜를 일깨우고 깨닫고자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요 이유이기 때문이니 역사적 지식이라면 표면적인 부분만 알고 이를 뇌리에 새기면 되겠지만 지혜에 관한 것이라면 그 이면에 숨어있는 깊은 뜻을 반드시 잡아내셔야 하며 잡아내서 일깨우고 돌이켜 고쳐 행하는 것이, 행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진정 바라고 원하시는 뜻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길 바라며.....
아브라함과 이삭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갈라디아서 3장, 4장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으니 4장22절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 24~26절에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이는 창세기에 기록된 말씀들을 인용하여 기록한 것으로써 서론에서도 이야기 한 바 그 때와 지금, 거기와 여기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니 잘 알고 계시듯이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 즉 사라가 낳은 이삭과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있었으며 이것을 "비유" 라 하심은 그 두 아들에 빗대어 그 안에서 찾아야 할 이면의 깊은 속 뜻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두 언약" 이라 하심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의지한다고 하는 우리들에게 두 번째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언약)이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잡아 내시길 바라며.....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과 그 이스마엘에게는 당연히 그의 자손들이 있기 마련이며..... 이스마엘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에서 그 자녀(자손)들로 더불어 종노릇하였다는 것은 마치 모세의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애굽의 종노릇하며 출애굽 후에 광야에서도 애굽의 종노릇하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출애굽 한 것을 후회(출애굽기 14장11~12절)하였으니 이는 종의 기질과 노예의 근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 이스마엘(과 그의 자손)과 닮아 있다다는 것을 뜻하며 이는 영적으로하면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다는 것이며 다시 말해서 첫 번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유대에 오셨을 때에 그들의 정욕대로 욕심대로 미워하고 때리고 침 밷고 모욕하고 비방하고 급기야 자칭 "유대인의 왕(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명분으로 그 미움이 극에 달해서 최고의 극형인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넘기움이 마귀적이고 정욕적이며 세상적인(야고보서 3장14~16절) 땅의 지혜(예루살렘)이며 이러한 종의 기질과 노예의 근성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온전히 좇아 온유하고 인애하고 양선하고 긍휼함으로 관용하며 용납하며 용서하며 최고한 법인 사랑으로 하였으리라.
그 반면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 곧 하늘의 지혜와 명철과 교훈의 말씀으로 낳은 자 곧 갈라디아서 3장16절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하는 것처럼 쉽게 말해서 역사 속의 "이삭" 은 그져 아브라함의 차자(次子) "이삭" 에 불과하며 하지만 약속의 말씀 속의 "이삭" 은 곧 "그리스도" 를 의미하니 위에 있지 않는 예루살렘은 종의 기질과 노예의 근성, 즉 마음에 불 일듯 이는 정욕(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수족 부리듯이 하고 싶은 욕심)대로 마음에 안 들면 불평하며 시기하고 다투며, 못마땅하면 미워하고 비방하고 사나워져서 함부로하기를 서슴치 않는 것으로써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뜻과 계명 곧 그 최고한 법을 지켜 행하려 할 것이며 지켜 행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지켜 행하기(히브리서 10장7절) 위해 본(本)을 보이신 것처럼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기를 죽기까지 하려 힘쓰고 애쓰며 노력(훈련,연습)하여야 하리니 부단히 "자기 자신" 을 버리고 비우고 죽이려고 애쓰고 힘쓰는 것이 아니라 정욕대로 방탕에 방임하여 "자기 자신" 이 아닌 타인(상대편,상대방), 다른 사람을 올무에 걸리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부딪히 하고 잡히게 하여서 죽게, 죽임에 넘기려 하는 것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9장6~8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또한 나사렛에서 태어난 유대인 중에 한 사람이며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던 예수님이 역사 속의 이삭은 차자(次子)이지만 약속의 말씀 속에서는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약속의 자녀요 진정한 유업을 이을 맏아들(장자)이며 그리스도가 될 수 있었으며 된 것은 육신에게 져서 정욕대로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였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곧 그 뜻과 계명을 지켜 행하시려 다른 사람을 죄인처럼 죽임에 넘기운 것이 아니라 부단히 자기 자신을 죽임(버리고 비움)에 넘기려 묵묵히 순종하고 복종하였기 때문이며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첫 번에 오셨던 그리스도의 때에 드러나고 나타나서 다 이루어진(요한복음 19장30절) 것이라면 두 번째 다시 오실 이유도 목적도 없으며 우리는 진정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면 그 본과 자취를 좇아 지켜 행하여야만이 우리 또한 약속의 자녀 곧 유업을 이을 약속의 아들들(자녀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