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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의 부활 증거하니...(사도행전 4장33절)

교훈 안에 2018. 8. 15. 17:42

오늘은 사도행전 4장33절에"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 에서 "주 예수의 부활"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먼저 "부활(復活)" 에 관하여는 앞서 기재했던 글(2018년5월23일자,2017년8월7일자,2016년8월8일자,2014년9월22일자,14년2월24일자) 적이 있었지만 성경 곧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사람(인생,인류)이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부활을 본 받아서(빌립보서 3장10~11)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붙은 자, 옷 입은 자가 되어 그리스도와 같은 "부활" 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부활서(復活書)" 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니 "부활" 이 없이는 하나님께 있는 온전하고도 참된 생명(요한복음 1장1~4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으며 그런즉 하나님께 있는 생명을 얻지 못하고서야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품고 있는 소망인 "구원(에베소서 2장5절)" 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니 이 모든 계획은 하나님의 뜻(디모데전서 2장4절)이며 그리스도를 위하심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즉 중개자(仲介者)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주는 사명과 책임과 의무로써의 자리(위치)이며 다만 그 막중한 책임과 의무와 사명을 잘 이행했을 때 맏아들로서의 명예와 영광과 기업(히브리서 1장2~4절)을 복으로 받으시는 것이며 이를 온전히 이루시고 끝내시기(로마서 9장28절) 위하여 두 번째 다시 오시는(임하시는) 것이니..... 

그러나 "주 예수의 부활" 을 본 받아 우리 또한 "부활" 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 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 즉 "십자가의 고난" 과 "못 박히심" 과 "죽으심" 의 본과 자취(베드로전서 2장21절)를 좇아서 행하는 "행함" 이 있어야 하며 이 길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에게 명하신 뜻 곧 그 명령과 (율)법과 계명을 지켜 행하는 길이니 부활 곧 하나님의 생명과 구원(히브시거 5장9절)에 이르기 위해 앞서서 그리스도께서 이를 지켜 행하셨기(히브리서 10장7절) 때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로마서 5장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이 "한 사람" 은 잘 알고 계시듯이 창세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아담(호세아 6장7절)" 이며 사람이 사람과의 교통함에 있어서는 유언(有言)이든 무언(無言)이든 오고가는 약속(언약)에서 비롯되며 이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교통(交通)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약속이 어긋나고 무너지는 순간 그 관계는 깨지는 것이므로 그것이 무엇이든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는데는 자신만을 위하는 어떠한 유익이나 이익 즉 욕심(야고보서 1장15절)에서 시작되며 이 세상에 한 가닥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런즉 6000년 전의 아담과 첨단을 달리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과 다른 것이 없으니 그 때나 지금이나 거기나 여기나 별반 차이가 없으며 삶은 현실아라 육신(몸,신체)의 안녕과 평안(편안)과 행복추구는 당연한 것이지만 이를 조절하지 못하면 끊임없는 욕심을 낳게 되고 그러한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고자 하는 욕심은 다른 사람을 사랑(인애,관용,긍휼,배려,양보,이해)하게 하기보다는 미워하고 비방하고 훼방하고 사나워져서 다투고 함부로하기를 서슴치 않게 되는 못됐고 나쁘고 악한 양심의 꾀와 죄를 범하게 되며 그러한 모습(자세)의 사람(인류)은 시한부 생명(사망)의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으며 이는 하나님의 영원무궁한 생명과 상당한 괴뢰감이 있기 때문에 이 괴리감을 제거하지 못하는 이상 하나님의 생명 곧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참된 논리이고 팩트이며 이러한 하나님과의 거리감과 괴리감을 얼만큼 좁히느냐에 대한 염원과 간절함이 그 최고한 법과 첫 째되는 계명을 얼마나 지켜 행하느냐와 함께 비례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받으신 "부활" 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잡아 내시길 바라며.....   

그래서 로마서 1장3~4절에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하는 것처럼 사람은 저마다 태어난 족보(계보)가 있고 혈통(혈육)이 있으며 하지만 이러한 것은 사람으로 자기의 유익과 이익 곧 욕심에 의해서 줄 세워주고 뒤 봐주고 눈 감아주며 때로는 잘라버리고 꺽어버리고 엎어뜨리고 밟아버리게도 하는 소위 관행을 좇게 만드는 사람의 뜻으로써 이러한 것으로는 하나(일)도 하나님과의 거리와 사이를 좁힐 수 없으며 다만 이러한 육체의 정욕(욕심)을 버리고 비우고 죽이는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짊어져야 할 십자가에 대한 수고스러움(마태복음 11장28~30절) 즉 고난(고뇌,고통,애통,심적 갈등)과 그 고난을 통하여야만이 얻게 되는 못 박음, 십자가의 못 박음이 없이는 결코 죽을(죽일) 수 없는 십자가의 죽음의 과정을 겪어야만이 비로소 사람의 아들(혈통,사람의 뜻,족보))을 뛰어넘어 한 차원 초월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되리니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부활" 이며 이를 믿는 믿음은 앞서서 본을 보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며 성결의 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기 때문에 영원전부터 계신 하나님과 같이 다윗보다, 아브라함보다, 노아보다도, 아담보다도 더 앞에 먼저 계신 자가 되는 것이며 우리 또한 그 길(지혜)을 좇아서 행하면 성결의 영(靈)으로는 부활을 경험하지 못하고 이미 죽어서 이 세상에 없는 그들보다 앞선, 먼저 있는 하나님의 아들(자녀)이 된다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계시록 20장6절에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하고 쓰고 있듯이 이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없고 그 욕심은 사람으로 못됐고 나쁘고 악한 양심의 꾀와 죄를 내게 하며 그러한 악한 양심(영혼)에서 비롯된 죄악은 사람의 영혼(에스겔 18장20절)으로 죽게하며 영혼이 죽게되니 육신(몸,신체) 또한 죽을 수 밖에 없으므로 이를 "둘째 사망" 이라 하는 것이며 바꾸어 말하자면 영혼이 잘 되어서 죽지 않게 된다면 영혼이 죽지 않는데 육신(몸,신체)이 죽을 수 없으며 그러나 이러한 일은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없었으며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므로 만약에 있어진다면 "첫 째 부활" 이 되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을 마지막에 드러내고 나타내어 이루시기 위하여 2000년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임하셔서) 먼저, 앞서서 본과 자취를 보이신 것이며 이를 사람들이 본받아서 행하였었더라면 어찌 첫 째 부활을 우리가 아직도 보지 못하고 둘 째 사망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는가? 하는 것이며 이미 죽어서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지금 살아서 하나님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생명과 구원에 대한 간절함과 염원으로 어찌하든지 그 소망에 도달하고자 하는 우리들이 아니면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뜻(히브리서 11장40절)이라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