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이 뒤로 물리침이 되고 의가 멀리 섰으며...(이사야 59장14절)
오늘은 이사야 59장14절에 "공평이 뒤로 물리침이 되고 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들어가지 못하는도다." "공평(公平)"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공평" 에 관하여는 앞서 기재했던 글(2018년11월19일자)에서 살펴 본 적이 있었지만 사람(인생)으로 언제나, 항상 자기 자신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쏠리지 않아서 골고루, 두루두루 화평케하고 화목하게 하며 분란과 대립이 아닌 평안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고 좋으며 편한 자신의 유익(처지,입장)이나 이익(기준,관점)을 절대로 내세우거나 앞세우지 말아야 하며 더불어 나 자신이 아닌 남(다른사람,타인,상대방)이 유익하도록 헤아리고 이해하여 배려하고 양보할 줄 알아야 하리니.....
이는 "사랑(고린도전서 13장)" 으로 행하라고 하신, "서로 사랑하라(요한일서 4장7~12절)." 하신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도 일치하는 것으로써 그런즉 "공평" 은 그 근본 바탕이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빌립보서 2장3~5절)" 즉 "사랑" 에서 비롯되며 이러한 FM적이고 교과적인 모법답안을 어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라.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현실이며 살아낸다는 것은 치열한 우리의 삶이기 때문에 마냥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남의 유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배려하고 양보하여, 타인을 헤아려 이해하려 함에 있어서 때로는 그러한 호의(배려,양보)를 상대방은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이는 일로 인하여 분명 한계를 느끼게 되고 어떤 면에서 볼 때에는 이렇게 행하는 모습이 그져 바보같아 보이거나 아니면 뭔가 약점이 있어서 그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주어진 상황이나 처지나 입장에서 마음으로 말석(末席)에 있으려하기 보다는 차라리 상좌(上座)에 앉아서 좌지우지하는 것이 더 좋으며 높아 보이고 칼자루(재력,권위,지위,학력... 등등등)을 이용하여 휘두르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게 되며 쥐고서 흔드는 편이 체면을 구기지 않고 자존심이 서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뜻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아 못마땅해질 때에는 얼굴을 붉히며 미워하고 비방(흉보고 욕함)하게 되고 언짢아질 때에는 사나워져서 다투고 함부로(무시,멸시,업신여김)하게 되며 마음에 안들때에는 욱하여 무례하게 되고 훼방(잘못되기를 바람)하기를 서슴치 않는 못됐고 나쁘고 악한 꾀와 죄를 내게 되는 것은 어쩌면 살아오면서 터득한 삶의 방법(지혜)일 것이라.
창세기 18장
17~19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 하는 것처럼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6000년전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는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하면 공평과 정의로 행할 수 있는가 하는 참되고 온전한 방법(지혜)를 알리는 의(義)와 공도(公道)의 말씀으로써 그렇게 행하게 하기 위함있으며 그러할 때에 그 후손들에게 하나님께 있는 복(福) 곧 생명과 안식과 구원을 주시겠다는 약속(언약)을 하신 것이며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공평과 정의로 행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멀리(이사야 1장4절)하고 등을(예레미야 7장24절) 돌려서 오히려 포학(이사야 5장7절)과 강포로, 궤휼함과 패역함으로 하였으며 행하라고 하신, 지키라고 하신 공평과 정의와 그 공도의 말씀들은 지켜 행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 이름을 부르짖으며 외치기만 한다고 하여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자녀,성도)이요 믿는 자가 되는 것이가? 하는 것이니 그 약속을 후손들이 지켜 행하였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이유와 목적은 없었을 것이며 또한 이렇게 행할 수 없었음으로 하여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비방하고 때리고 침 밷고 곤욕을 치르게 하며 함부로 하기를 서슴치 않는 죄와 악에 속하여 행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그와같이, 그들과 똑같이 행하지 않고 공평으로, 공도로 행하기 위하여 입을 닫아 범죄치 않으려 잠잠하였고 몸(행실)으로 범죄치 않으며 묵묵히 다가오는 길,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으니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었다다면 6000년이 흐른 지금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실(임하실) 이유와 목적 또한 없었으리니 그리스도를 위하심이 아니라 우리들을 위함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잡아 내셨으면 한다.
그래서 예레미야 5장25절에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하시면서 28절에 "살찌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히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송사를 공평히 판결치 아니하니~ " 하고 쓰고 있듯이 사람이 처음에는 어디의 소속(학교,직장,단체,모임... 등등등)이 되거나 속한 곳의 시작한 말단(末端)에 있을 때에는 그 임하는 마음의 자세가 성실하고 신실하고 순수하고 순전하며 충성과 열심과 진심으로 임다가도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흐르는 동안 타성에 젖고 그러한 분위가에 함께 휩쓸려서 어느새 장(대장,회장,사장,임금)이 되어 능구렁이처럼 꾀만 늘고 눈치만 늘고 요령만 생겨서 먼저 된 자로, 앞선 자로서 본(本)이 되어 추진하고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시키기 바쁘고 몸(행동)이 아닌 말로 다하며 자기 자신을 위주(유익,이익)로 좀더 편하게, 좀더 좋게, 좀더 쉽게 하려다보니 상대방(남,다른사람,타인)의 어려움이나 고초나 그러한 처지와 입장에 눈을 감아버리며 오히려 불공정한, 불평등한, 불합리한, 부조리한 상황의 중재자 역할보다는 부추기는, 악화시키는 것에 동조자가 되어, 방관자가 되어 행하기도 하니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어떤 문제로 건들려지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다툼과 갈등과 대립이 팽팽하여 터져 버릴 것 같은 것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세대가 그러하였고, 우리의 부모의 세대가 그러하였고, 우리의 부모의 부모의 세대가 그러하였고 그 부모의 부모의 세대가 그러하여 대대손손 이어져 온, 내려 온 유전과도 같은 우리 사람(인생)의 모습이며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여 안 믿고 못 믿는 저 세상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 좋은 일(사도행전 3장19절) 곧 생명과 안식과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로막은 것은 우리 사람 자신이라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마가서 6장7~8절에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쓰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영(靈)이신데 보이는 것들의 어떤 수확물이나 열매 곧 돈(헌금)을 기뻐하시고 바라실까? 하는 것이니 하나님 앞에 공평과 정의와 그러한 공도의 말씀으로 행함에 있어서는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예외가 없으며 값없이, 돈없이 주어야 하는 것이며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으로 자기 자신의 유익과 이익에만 치우지지 않고 쏠리지 않아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남,타인,상대방)의 입장과 처지와 상황을 헤아리고 살펴 이해하여 배려하고 양보하며 무슨 일이나 어떤 상황을 해결하고 판단하고 추진함에 있어서 중재자가 되며 먼저 본(本)이 되어 말뿐인,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는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에 행실(행동,행위)로 보여줄 줄 알 때에 하나님 앞에 자랑이 있으며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이행자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