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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창세기 9장25절)

교훈 안에 2021. 4. 17. 08:44

오늘은 창세기 9장25절에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에서 "가나안(Canaan)"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가나안" 은 모세의 때에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430년간 종노릇 하던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출애굽하여 시내 광야를 지나서 40년만에 도착한 곳이 바로 "가나안" 이며 하지만 이미 아브라함의 때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창세기 17장8~9절) 이 가나안에는 모세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가나안" 에 들어가지(신명기 1장37절) 못하였으니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 들이시기를 약속하셨고 하지만 왜 들어가지 못하였는지 그 때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배경과 그들의 마음의 상태(모습,자세)를 살피고 돌아보아 우리에게 거울과 경계와 교훈으로 삼아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그로 인하여 생명과 안식과 구원(디모데후서 3장15~17절)이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길 바라며...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지역이 모세의 때의 그 "가나안 땅" 이며 현재는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인 여러 이유가 서로 복합적으로 맞물려서 가자지구만이 팔레스타인의 땅으로 남아있고 지금은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땅이 되었으니 "가나안" 의 유래는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 중에 창세기 10장6절에서 함의 아들 중에 "가나안" 이 훗날 가나안 7족으로 나타났으며 중요한 것은 히브리서 4장8~9절에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신다고 하시는 마지막 때에 우리 또한 가야 할 안식의 땅으로써의 약속의 땅이 바로 "가나안" 이기도 한데 제아무리 안식의 땅,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할지라도 실질적인, 본질적인 의미의 마음의 안식과 영혼의 쉼을 얻지 못하고 여전히 분란과 대립과 투쟁과 갈등으로 인한 테러와 전쟁이 존재하고 있다면 거기에 들어간들, 그 곳에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고 거기를 차지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즉 육적인 눈에 보이는 "가나안" 이라고 하는 것은 표면적인 의미에 불과하며 표면적인 적은 그저 초보적이고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가나안" 을 말하고자 하여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록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이면 즉 속에 있는 "가나안" 에 대한 참 뜻, 그 뒷면에 있는 참 형상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며 이를 알리고자 전하고자 하여 기록하신 약속의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남아 있는 그 안식할 때가 바로 구원의 때요 그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안식과 쉼을 얻게 되리니 그 때 그 곳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우리가 서기 위해서는 먼저 선한 양심으로 바뀌고 변화되어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베드로전서 3장21절)에 서야 하며 그 길에 서야만이 우리의 소망인 진정한 생명과 안식과 구원이 있다는 것을 잡아 내셨으면 한다.

그래서 에스겔서 23장4~5절에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사마리아오홀리바예루살렘이니라. 오홀라가 내게 속하였을 때에 행음하여 그 연애하는 자 곧 그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 11절에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유다와 예루살렘은 다윗과 솔로몬을 통하여 형성된 이스라엘 나라, 국가를 의미하며 다윗을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보면 야곱의 아들 유다가 있고 또 거슬러 올라가면 이삭의 아들 야곱이 있으며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있고 노아의 아들인 셈의 자손 중에 아브라함이 있어서 노아가 그 조상인 것을 알 수 있으니 중요한 것은 형인 오홀라 즉 사마리아가 처음에는 애굽, 그 다음에는 앗수르, 다음에는 바벨론과 행음을 하였으며 이를 보았던 동생 오홀리바 즉 예루살렘은 조심하고 근신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 형보다 더 음욕을 품고 그 행음함이 심하고 부패하였으니 아버지이신 아버지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 얼마나 개탄하고 한탄하실 일이었을까? 하는 것이며 더욱 놀라운 것은 에스겔서 16장3절에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사람이라." 하시면서 15절에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인하여 행음하되 무릇 지나가는 자면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하시며 32절에 "그 지아비 대신에 외인과 사통하여 간음하는 아내로다." 하시는 것처럼 유다와 예루살렘은 그 근본이 셈 자손인데 느닷없이 "가나안" 이라 하신 것은 가나안의 하는 짓과 별반 차이가 없고 하는 행실이 하나님의 법과 계명이신 공정과 의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에 취하여 무릇 지나가는 외인, 이방인들과 다름없이 포학와 죄와 악으로 행하기 때문에 그리 말씀하신 것으로써 그 지아비는 물론 육적인 지아비도 있겠지만 영적인 지아비 즉 남편(예레미야 3장14절) 되시는 하나님이며 외인은 애굽, 앗수르, 바벨벨과 같은 이방족속을 의미하니 하나님을 잘 몰라 안믿고 못믿는 외인, 이방족속들과 똑같이 포학과 죄와 악으로 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행음이요 십계명에서 말씀하시는 참 뜻, 참 형상의 간음하는 것이니 그런즉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가나안 족속을 쳐죽이고 그 땅을 빼앗기 위하여 서로 싸우고 다투고 대립하고 갈등하면서 서로 죽고 죽이는 테러와 전쟁을 하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 밷는 것과 같은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나안의 모습이 아니니 어떤 부모가 자식들이 형제들끼리 싸우고 다투고 전쟁하는 것을 원할까? 하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골로새서 3장8~11절에 "모든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로 행하던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어 새롭게 하심을 받은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 하고 쓰고 있듯이 이제는 믿고 안믿고, 하나님의 이름을 외치고 안외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고 안받고, 종이냐 자유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전에 행하였던 믿는다고 하면서 미우면 미워하고 뜻대로 안되면 분노하고 사나워져서 다툰다면 그 믿음의 정체성을 믿을 수 있을까? 또한 마음에 안들면 비방하고 훼방하며 못마땅하면 함부로하고 갑질하는 포학과 죄와 악으로 행한다면 그 외침에 그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실까? 이전에 행하던 이러한 모습 옛사람의 마음으로 아직도 여전히 행하고 있다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 술 취하여 행음하고 간음하는 가나안의 모습이며 이제는 마음을 다스리고 제어하고 절제할 줄 알아서 하나님의 완전한 법과 최고한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 하신 말씀대로 지켜 행할 줄 아는 그 사람이 참되고 온전한 안식의 땅 "가나안" 에 들어가는 자요 차지하는 자요 비로소 생명과 안식과 구원에 이르게 되리니 "사랑" 은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를 먼저 헤아리고 이해하고 존중하여서 관용하고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임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