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창세기 18장19절)

교훈 안에 2021. 6. 10. 18:39

오늘은 창세기 18장19절에 "내가 그로 그 자식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 에서 "의(義)" 와 공도(公道)"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여기에서 "의(義)" 라 하심은 "공의(公義)" 를 의미하며 공의, 공도는 옳고 공평한 도리를 뜻하며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 후손을 택하신 이유는?, 그리고 아브라함과 더불어 거슬러 올라가서 노아, 더 거슬러 올라가서 아담을 택하셨던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비방하고 훼방하고 사나워져서 다투고 함부로하고 갑질하는 죄와 악으로 행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도(道)의 근본인 공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 함이며 우리 또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께로 지으심은 받은 사람으로서 못됐고 나쁘고 악한 마음, 꼬이고 부정적이고 사나운 심성을 버리고서 옳고 공평한 도리로 행하여야 하는데 과연 옳고 공평한 도리 곧 하나님의 공의, 공도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오늘 이 시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니.....

그러나 하나님께서 26절에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하셨고 32절에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쓰고 있듯이 롯이 살고 있던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의 공의, 공도로 행하는 의인 단 십인이 없어서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을 당하게 되어 지금은 그 흔적 조차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때를 지나 모세의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안식의 땅 가나안에 이르게 하시려고 시내 광야를 지나가게 하셨지만 시편 78편17~18절에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 " 하시는 것처럼 지존자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것은 그 도(道)의 근본인 공의, 공도로 행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과 탐욕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하며 사람의 욕심과 탐욕이라 함은 서로 줄 세우고 눈 감아주고 뒤 봐주면서 그 마음을 상좌(上坐)에 두고서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좌지 수족 부리듯이 하려 하며 만약에 뜻대로 안되면 잘라버리고 마음에 안들면 꺾어버리고 못마땅해지면 밟아버리는 것으로써 이로 인하여 가나안에 들어간 자는 여호수아를 비롯한 몇 명 밖에 되지 않으며 예레미야 5장1절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하고 쓰고 있듯이 예레미야서가 기록되었던 시대적 배경은 왕국 시대 사울, 다윗, 솔로몬을 지나서 남유다, 북이스라엘로 분열된 분열왕국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기록하신 말씀이며 그 시대에 공의, 공도로 행하는 자 한 사람이 없어서 예루살렘 하나님의 백성은 이방족속 바벨론에 의해 에워싸이고 모세의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자녀,성도)들이 애굽에 430년간 종노릇 하였던 것처럼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노예 생활을 하였으니 예레미야 4장22절에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하시면서 25절에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하시는 것처럼 그 때, 그 시대에 과연 사람이 없었을까? 죄를 범하며 악을 행하기에는 손과 발과 눈과 입이 바빴지만 공의 공도로 행하는 한 사람이 없었음을 의미하며 또한 그 때 그 시대에만 그러하였던 것이 아니라 시간은 흘렀지만 공간은 바뀌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거기나 여기나 별반 다르지 않아서 거울과 경계(고린도전서 10장11절)와 교훈(로마서 15장4절)으로 삼아서 우리에게 생명과 안식과 구원으로 인도하여 주시려고 기록해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11장42절에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운향과 모든 채소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하고 쓰고 있듯이 이것이 어찌 바리새인에게만 국한된 말씀일까?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에게 참으로 바라고 원하시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 물건의 어떠함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어떠함 즉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인 공의, 공도로 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써 공의, 공도 즉 옳고 공평한 도리의 시작은 먼저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를 헤아리고 이해하고 존중하며 관용하고 배려하고 양보하는 "서로 사랑하라." 하신 하나님이 최고한 계명에서 비롯되며 공의, 공도로 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방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마녀 사냥하듯이 비방하고 훼방하고 함부로하고 갑질하는 죄와 악을 버리고 비우는 피땀눈물의 노력 곧 십자가의 고난을 겪어서 이겨낼 때에 가능하기 때문에 이를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 십자가의 죽으심을 본보기로 보이셨으니 이는 그리스도 당신을 위하심이 아니라 로마서 3장10~12절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고 쓰고 있듯이 6000년 전 그 때나 지금이나, 거기나 여기나 공의, 공도로 행하기보다는 죄와 악에 치우쳐서 행하고 있는 우리들을 위하며 앞서서 몸소 실천하여 본보기를 보이심으로 하나님께 있는 생명과 안식과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