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더라. 해산할 때에...(창세기 38장18절)
오늘은 창세기 38장18절에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더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에서 "잉태" 와 "해산"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유다는 야곱이 첫 번째 부인 레아를 통하여 얻은 세째 아들이며 또한 유다는 훗날 가나안 사람 수아를 통하여 아들 셋을 얻었으며 그러나 유다의 첫 째, 둘 째 아들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므로 죽임을 당하였니 "악하다." 는 것은 사람을 대하여 서로를 대하여 헤아려 이해하고 존중하며 관용하여 배려하고 양보하는 사랑으로 대접할 수 없고 마음이 꼬이고 부정적이고 사나운 심성을 품고 있어서 본능적으로 미우면 미워하고 뜻대로 안되면 분노하고 마음에 안 들면 비방하고 못마땅하면 사나워져서 다투고 함부로하며 언짢으면 갑질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사람의 악함" 이며 또한 유다의 첫 째 아들의 부인이었던 다말을 통하여 27절에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하시는 것처럼 쌍둥이를 낳았으니... 지금 오늘날의 시대적인 상황과 흐름에 비추면 야곱처럼 부인을 넷이나 둔다거나 유다의 아들 부인 즉 며느리에게서 아들을 얻는다거나 또 노아처럼 딸에게서 자식을 얻게 되는 이러한 이야기가 성경 66권에 많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제는 시대적으로 비윤리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이야기이지만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로마서 1장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 하고 쓰고 있듯이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육의 세계에 있는 것들 곧 만물을 들어서, 거기에 빗대어서 하나님 나라 천국 곧 영의 세계가 어떠함을 알리고자, 전하고자 함이 본질이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들은 표면적인 그림자이므로 그 뒤에 숨어 있는 참 형상이 진짜 실물, 실상 즉 그 짝(이사야 34장16절)이 무엇인지를 말씀 안에서 찾아야 하리니 쉽게 말해서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겹쳐져서 오버랩 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취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고 있는 겉표면 즉 껍데기가 아니라 그 속에 담겨있고 그 뒷면에 숨어서 숨겨져 있는 온전한 참 형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27~28절에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하시는 것처럼 이 말씀은 이사야 54장1절을 인용하신 것으로써 한 생명을 잉태하고 해산하는 것은 축복이요 행복인데 잉태치 못하고 해산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으며 또한 홀로 사는 자라면 처녀이거나 과부를 의미하는데 신랑이 없는 처녀가, 남편이 없는 과부가 어찌 잉태하고 해산하여 자녀를 낳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온전하고 완전한 뜻은 숨겨져서 숨어있는 그 뒷 면에 있기 때문에 절대로 표면적으로는 이해할 수 도, 깨달을 수도 없는 말씀이며 또한 이는 일점일획(마태복음 5장18절)도 반드시 다 이루어야 할, 이루실 예언의 말씀, 약속의 말씀 차원에서 실물 곧 참 형상 즉 "짝" 을 찾아야 하리니 다시 말해서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보이지 않는 영(靈) 곧 성령을 신랑과 남편에 빗대어 기록하고 있어서 예레미야 3장14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하시면서 호세아 2장19절에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 하고 쓰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신랑이요 남편으로서 장가들었던 신부요 아내는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신부가 되는 자는 그 신랑에게 마땅히 순종하는 것처럼, 아내가 되는 자는 그 신랑에게 마땅히 의지하는 것처럼 그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 이며 모든 말씀의 핵심 키워드는 곧 최고한 계명과 완전한 율법인 "서로 사랑하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고 지켜 행하는 것이며 그러나 우리 사람은 우리가 그러하고 우리의 보모가 그러하였고 우리의 부모의 부모가 그러하였고 그 부모의 부모가 그러하였듯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비방하고 훼방하고 사나워져서 다투고 함부로하는 죄를 범하며 악을 행하는 죄의 종으로써 순종하며, 복종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마음과 생각은 홀연히 바뀌고 변화될 수는 있지만 몸(행실,행동)이 기억하고 있던 것에서 쉽사리 바뀌기는 어려우므로 반드시 살을 에는 피땀눈물의 노력 곧 십자가의 고난을 겪어야 하며 겪어서 죄와 악을 이겨내고 그것에서 벗어나야 하리니 이를 가장 앞서서 몸소 실천하여 본보기를 보이신 것이 바로 "그리스도" 로서 이렇게 본보기를 앞에서 보이신 것은 그리스도 당신을 위하심이 아니라 그 본과 자취를 좇아서 똑같이 따라 지켜 행할 우리들을 위하심이며 우리로 하나님 남편과 그리스도 신부 사이에서 잉태하고 해산한 약속의 자녀로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며 하지만 2000년 전 그 때 그 시대 유대 땅에서 자녀를 얻었더라면, 열매(계시록 14장4절)를 맺었더라면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런즉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시는 마지막 때, 오늘날의 신랑되고 남편되시는 성령을 "보혜사 성령" 이라 표현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바로 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신(神)도 그리스도의 영(靈)도 다 은혜로 보호해주는 진정한 스승 곧 "보혜사 성령" 이며 보이지 않는 영 곧 성령을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내 주신 것이 요한복음 6장63절에 "그 이르신 말씀" 이 영 곧 성령으로써 그 이르신 약속의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창세기에 계시록까지 관통하고 있는 최고한 계명, 완전한 율법인 "서로 사랑하라." 임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 5장3~6절에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하고 쓰고 있듯이 우리가 항상 깨어서 근신하며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몸과 마음에 물들어서 배어 있는 죄와 악이며 사람이 사람을, 서로가 서로를 밉다고 미워하고 뜻대로 안된다고 분노하고 마음에 안든다고 비방하고 못마땅하다고 함부로하고 언짢다고 갑질하는 죄를 악을 여전히 행하고 있으면서 절대로 평안하다, 안전하다 말할 수 없지만 우리 자신을 "성경" 이라는 거울에 비추어서 스스로를 바라볼 수 없다면 바라보아 거울과 경계과 교훈으로 받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그 죄와 악으로 인하여 "안전하다, 평안하다." 하는 말과는 다르게 늘 근심과 걱정과 슬픔과 괴로움을 만들어서 평안히 쉴 수 없게 되며 더욱이 이 죄와 악이 우리로 멸망과 파멸과 사망으로 이끌어서 구원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하여 안전하게 될 수 없게 하리니 이는 시간이 걸리는 문제가 아니라 잉태한, 임신한 여자가 해산 고통이 언제 이를지 모르고 또한 그 고통은 갑자기 홀연히 시작되는 것처럼 순식간에 순간적으로 이동하게 되며 죄와 악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멸망과 파멸과 사망을 잉태하고 해산한다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