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누가복음 12장1절)
오늘은 누가복음 12장1절에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에서 "누룩 곧 외식"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누룩" 이라 하심은 빵이나 술을 발효시킬 때 쓰던 효모를 의미하며 "누룩" 의 아주 조금의 양으로도 떡이나 빵의 온 덩어리에 퍼져서 부풀리게 하는 그러한 누룩의 성질에 빗대어 비유하여 사람의 "외식(外飾)" 곧 보이는 앞에서나 잘 보여야 하는 곳에서는 더 없이 선하고 너그럽게 행하면서 보이지 않는 뒤에서나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는 다른 사람을 흉보고 욕하면서 깎아내리고 밟아버리는 못됐고 나쁘고 악한 죄대로 행하는 사람을 에둘러서 표현하신 말씀으로써 이것이 비단 "바리새인들" 에게만 국한된 말씀일까? 하는 것이니 성경 66권은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하고 다른 사람에게 눈총을 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 로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며 이를 마태복음 16장9~12절에서는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6:51)" 하시면서 사람의 마음 즉 영혼을 살리시는 말씀을 전하고 알리고 가르치셨으며 그 말씀을 "떡" 에 빗대어 비유로 하신 말씀이니 아직도 진짜 빵이나 떡으로 오천 명, 사천 명을 먹이는 기적과 이적을 행하였다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를 없는 것도 뚝딱 만들어내는 "도깨비" 나 또 "마술사" 로 만드는 것이며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얻고자 하는 누룩 곧 "교훈" 은 말로나 입으로나 혀로는 분면 "하나님을 믿습니다.", "주여 주여!!" 외치고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을 위해서라면 뒤로 줄 세우고 뒤 봐주고 눈 감아주면서 행여 마음에 안들거나 못마땅해지면 잘라버리고 꺾어버리고 밟아버리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사29:13)을 삼는 것이 아니라 이는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눅5:8)" 오직 헤아려 이해할 줄 알고 존중할 줄 알며 배려할 줄 알고 양보할 줄 아는 순전하고 솔직하고 진실함으로 행하는 생명의 교훈으로 행하여야 하리니 그리스도께서 이를 위하여 우리들 앞서서 죄에 대하여 단 번에 죽으시는 "십자가의 죽으심" 을 몸소 실천하여 본보기를 보이셨음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장5절에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6000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성경 66권을 주신 이유와 목적은 그저 역사적 사실을 지식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라 노아를 통하여,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세를 통하여, 다윗을 통하여... 등등등 그 때 그 시대와 그 세대의 구시대적 악습이나 망령된 행실에 빗대어 거울과 경계(고전10:11)를 삼아서 생명의 교훈(롬15:4)으로 알리고자 전하고자 하심이기 때문에 더럽고 추한 마음 즉 그러한 누룩을 깨끗이 씻어서 선한 양심(벧전3:21)으로 바뀌고 변화되어야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나라 천국을 갈 수 있기 때문이며 또한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 자신의 기분에 따라서 미우면 미워하고 뜻대로 안되면 분노하고 마음에 안들면 비방하고 못마땅하면 함부로하고 갑질하는 거짓되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밉더라도 헤아려 이해해줄 줄 알고 뜻대로 안되더라도 존중해줄 줄 알며 마음에 안들더라도 배려해줄 줄 알고 못마땅하더라도 양보해줄 줄 아는 "사랑" 으로 행하게 하시려고 성경 66권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니 이것이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비방하고 때리고 침 밷고 업신여길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똑같이 되어서 물고 뜯고 싸우고 몇 배로 되갚아주는 보복이나 복수를 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입술(말)로 범죄치 않으려 잠잠(시39:1)하시고 몸(행실)으로 범죄치 않으려 묵묵히 십자가의 죽으심의 길(롬6:5~11)을 걸으시는 본(本)이 되신 교훈의 말씀의 좋은 누룩(새 누룩-고린도전서 5장7절)으로 행하신 것은 우리들로 그 길을 좇아 오게, 따라 오게, 지켜 행하게 하시려고 앞서서 본보기(벧전2:21)를 보이신 것이며 이를 통하여 많은 아들(히2:10) 곧 처음 익은 열매를 얻기 위하여, 찾기 위하여 두 번째 다시 오시는 것임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 6장3~5절에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교훈 즉 "십자가의 죽으심의 도(道)" 에 착념(늘 마음에 두고 생각하는 것)치 않는다면 다른 교훈, 즉 말로만 입으로만 혀로만 교훈을 베풀고 정작 행실은 높은 자리 상석(上席)에 앉아서 뜻대로 마음대로 좌지우지 칼자루를 휘두르려 하면서 못마땅해지거나 언짢아지면 함부로하고 갑질하면서 시끄럽고 소란스럽고 야단스럽게 들레면서 언쟁하고 분쟁하며 훼방(잘못되기를 바라는 것)하며 다투고 싸우며 대립과 갈등만 일으키게 되리니 요한이서 1장5~6절에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시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좋아하고 존경하며 마음에 들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푸는 것은 이를 "사랑" 이라 말하지 않고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하시면서 전하고자 하신 "사랑" 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와 상황을 헤아려 이해하고 존중하여서 용납하고 배려하며 양보해 줄줄 아는 것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눅10:25~28)을 좇는 것이며 이를 하나님께서 처음(창세기)부터 주셨지만 꼬이고 부정적이고 사나운 심성을 다스리지(창4:7) 못하여 그 동생 아벨을 쳐죽인 가인(요일3:11~13)을 기록하신 것은 "가인" 의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과 경계로 주신 것이며 이로써 더럽고 추하고 거짓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씻을 줄 안다면 선한 양심으로 바뀌고 변화되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아가게 하는 생명의 교훈 즉 "그리스도 교훈의 새 누룩" 을 먹게 하심이 오천 명, 사천 명이 아니라 온 지구상에 모든 사람도 먹이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