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 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에스겔 42장20절)
오늘은 에스겔 42장20절에 "그가 이와 같이 그 사방을 척량하니 그 사방 담 안마당의 장과 광이 오백 척씩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에서 "담"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담" 이라 함은 집이나 건물의 둘레를 막고 또 안쪽과 바깥을 구분 짓기 위해서 돌이나 흙으로 쌓아 올린 형태 즉 경계, 한계를 의미하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하여 보여주신 "성읍(성전)" 은 참 형상(실물)이 아닌 "성읍 형상 같은 것(겔40:2)" 하듯이 다른 모양 곧 이상(異狀)으로 보이셨기 때문에 "담" 역시 이상(異狀) 곧 "다른 모양" 이므로 그 참 형상(실물,실체)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 "담" 에 관하여 말하고자 하는 내용으로써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보여주시고 만들게 하신 "장막(히8:5)" 또한 마찬가지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하여 만들게 하신 "방주(벧전3:20~21)" 역시 예비(히11:7)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 사람의 손(행17:24)으로 지어진 어떤 형태 즉 성전이나 장막이나 배(방주)가 아니니 왜냐하면 지금 지어져서 올린 수많은 교회 건물이나 셀 수도 없는 성당 건물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식양과 기구와 그 제도대로 지어지지도, 만들어지지도 않았을뿐더러 궁극적인 목적과 본질은 우리 사람을 집으로, 장막으로, 성전(고전3:16)으로 제대로 짓고 만들어서 사람을 거처(요14:23)로 삼아 함께 영원히 살고자 하시는 것임을 항상 인지하고 자각하고 있어야 하리니 그런즉 "방주, 장막, 성읍(성전)" 의 참 형상은 사람의 마음이 되는 것이요 "척량" 은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에게 보이신 식양과 기구와 그 제도는 오직 율법의 계명(신8:1~2)" 밖에 없으므로 계명을 지켜 행할 때에 생명과 안식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장자의 명분과 자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지켜 행하지 못한다면 그 지어 올린, 쌓아 올린 교회나 성당 즉 장막이, 성전이, 방주가 무슨 의미와 효력이 있을까? 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요 장막이요 성전이요 배(방주)라고 한다면 지계석, 경계석(잠22:28)인 "담" 으로 무엇을 구분하고 어떤 것을 구별해야 하는지 그 참 뜻을 알아야만이 성전 밖(계11:2)으로 나가지 않을 수 있으며 성전 안에 있어야만이 하나님께서 처소로 삼을 집(장막,성전,방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그래서 이사야 5장1~2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하시면서 5~7절에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사람을 항상 산(山)에 두시고 거기서 만나셨으니 아담의 때에는 에덴 동산, 노아의 때에는 아라랏 산, 아브라함의 때에는 모리아 산, 모세의 때에는 시내 산, 2000년 전 그리스도의 때에는 감람 산,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시는 때에는 시온 산으로써 "인산인해(人山人海)" 하듯이 이제는 사람의 육신(몸)이 모래알(롬9:27)처럼 버글버글 많이 모여있는 그런 인산인해는 큰 의미가 없고 그 마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율법의 계명에 순종하는 한 뜻, 한 마음이 모이고 모인 산 즉 "보이지 않는 산" 이라는 것을 잡아내시길 바라며..... 하나님은 농부(요15:1)이므로 거기에 극상품 포도나무(씨-눅8:11)를 심기 위하여 척박한 땅(흙,밭)을 기름진 땅(좋은 밭-눅8:15)으로 만들어서 도둑(강도,절도)이 오지 못하도록 망대도 세우고 거둬들이기 위해서 술틀(추수)도 팠으며 농부의 바램은 언제나 극상품의 좋은 포도를 맺는 것이지만 그 바램과는 상관없이 들포도를 맺혔으니 곧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씨" 인 율법의 계명을 지켜 행함으로 "사랑" 이 밑거름인 공평(공정,평등)과 의로움(선의)의 경계의 "담" 을 넘지 않기를,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원하셨지만 오히려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비방하고 사나워져서 다투는 포학으로 행하였으며 도리어 잘라버리고 꺾어버리고 밟아버리면서 그저 "주시옵소서!!", "주여 주여!!" 외치고 부르짖기만 하니 하나님을 잘 몰라 안믿고 못믿는 세상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 것이 있어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자녀,성도)으로 구분 지어주고 구별해 주겠는가? 하는 것으로써 그 울타리가 걷어 먹히고 그 담이 헐려 짓밟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지 못한 우리 사람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며 시편 80장8~13절에서는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가나안)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수풀의 돼지(이방 족속)가 상해하며 들짐승(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먹나이다." 하고 쓰고 있듯이 모세의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로 430년간 애굽에 종노릇하게 하시고 아브라함과 하신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켜서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홍해를 건너 시내 광야를 지나가게 하신 것은 애굽의 법 아래에서 종노릇하던 종의 습성과 근성을 버리게 하기 위함이며 대신에 이제는 하나님의 법인 율법의 계명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셔서 가나안에서 주실 생명과 안식과 구원의 복(福)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종이 아닌, 하나님은 바알(주인)이 아닌, 주종관계가 아닌 남편(신랑)과 같은 친구로, 동등한(빌2:7)한 관계로 영원히 함께 하고자 하시는 것이며 이러한 역사적 사실, 사건은 그저 지식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신다고 하신 말세를 만난 우리들에게 거울과 경계(고전10:11)와 생명의 교훈(롬15:4)으로 주신 것으로써 우리에게 남아있는 안식(히4:8~9)이 참 형상의 "가나안" 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경계와 지계와 한계를 넘지 않는 "담" 으로써 율법의 계명을 주신 것임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10장3~6절에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 하시는 것처럼 우리 사람은 현인류(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가 있은 이래로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거기가 어디가 되었건 자신들의 이권이나 패권과 배(성공)를 위하여 서슬퍼런 이빨을 드러내고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고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즉 육체대로 싸우는 보복, 복수, 테러를 비롯한 수많은 전쟁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이러한 전쟁은 어느 한 쪽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양쪽다 멸망하고 파멸되고 사망하는 길에 불과하며 그것이 인류의 역사이며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 즉 내 옆에, 내 주변에 있는 상대방이 문제(탓,핑계)가 아니라 우리 자신 스스로의 내면(마음)에 아무런 유익도 없는 잣대나 생명도 줄 수 없는 논리(이념)로 "담" 을 쌓아놓고 행여 넘어오거나 그 경계선을 밟으면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나이,성별,재력,학력,권력,지위... 등등등)으로 칼자루를 마구 휘둘러서 쓰러지고 넘어지고 엎어지게 만들었으니 그러한 담을 헐어버리고 무너지게 할 수 있는 다윗의 돌맹이나 다니엘의 뜬 돌과 같은 강력은 오직 서로의 입장과 처지를 헤아려 이해하고 존중하며 관용으로 배려하고 양보하는 "사랑하라." 하신 율법의 계명 밖에 없으며 "사랑" 은 내가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해와 존중과 배려와 양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할 일이라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이며 다만 미워도 싫어도 마음에 안들어도 못마땅해도 언짢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헤아려 이해하며 마음에 안들어도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해주며 못마땅해도 함부로하는 것이 아니라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 으로써 요한일서 4장20~21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눈에 보이는 내 주변의 사람들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믿습니다!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요 거짓말이며 또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뒤집어서 말하자면 뜻대로 마음대로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비방하고 훼방하고 함부로하고 갑질하는 죄대로 악대로 행한다는 것을 의미하여며 이러한 죄와 악으로 행하여서는 생명의 보호를 절대로 받을 수 없고 생명의 보호막(담)이 없음을 인하여 항상 멸망과 파멸과 사망으로 내몰리게 되며 그러나 사랑으로 행하는 자는 "사랑" 그 자체가 "하나님(요일4:16)" 이요 "생명(요1:1~4)" 이므로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 위에 서 있기 때문에 멸망(해로움)이나 파멸(급절)이나 사망(썩음)이 그 "담" 을 넘어올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