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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누가복음 19장30절)

교훈 안에 2023. 4. 15. 11:51

오늘은 누가복음 19장30절에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에서 "나귀새끼"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나귀" 는 흔히 "당나귀" 라고 하는 "말(馬)" 과에 속하는 포유류 동물로써 말(馬) 보다는 다리가 짧고 느리기 때문에 사람이 타고 다니는 용도로 쓰이기 보다는 물건을 운반하거나 부리는 목적으로 나귀를 사용하며 그에 반해서 "말(馬)" 은 에스더 6장7~9절에 "왕께 아뢰되 왕께서 사람을 존귀케 하시려면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 하고 쓰고 있듯이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우리 나라 옛날(조선,고려,삼국... 등등등) 생활상의 모습만 봐도 뒤를 따르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걸어다니고 좇아서 뛰어 다닐지언정 왕(임금)이나 직책 높은, 신분 높은 분들은 말을 타고 이동하거나 움직이면서 그 권위나 위엄을 뽐냈던 것처럼 "말(馬)" 은 우리 사람에게 존귀함을 뒷받침 해주는 그러한 존재였으니... 그렇다면 유대인의 왕(마2:2)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왜 어찌하여 "말(馬)" 이 아닌 나귀 그것도 새끼(눅19:35)를 찾으셨고 또 그 위에 타셨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로써 스가랴서 9장9절에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이러저러한 능력이나 힘(재력,학력,지위,나이 많음,성별의 우월성... 등등등)을 의지해서 그 존엄이나 존귀함을 뽐내고 싶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또 그러한 상좌(上坐)를 통하여 자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상대방을 좌지우지 휘두르고 싶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마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요3:16)이시요 그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빌2:6)이심으로 동등됨을 취하여 얼마든지 그 권위나 위엄이나 존귀함을 당당하게 으시댈 수도 있고 그 도구로써 얼마든지 훌륭한 의복이나 멋진 "말(馬)" 을 요구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귀 새끼" 를 타신 것은 떠받듦을 받고자 하심도 아니요 섬김을 받고자 하심도 아니라 오직 겸손함으로 사람들을 섬김(마20:28)에 있어서는 따라올 자가 없는 그러한 "왕 중 왕" 이심을 드러내고 나타내서 이루려 하심이요 또한 겸손함은 말에 있지 않고, 말로만 "나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라고 떠드는데 있지 않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줄 아는 마음으로 행할 줄 알 때에 비로소 증명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스가랴 9장9절의 말씀을 요한복음 12장14~15절과 마태복음 12장5절의 말씀으로 응하기 위하여 그 마음을 가난하고 낮은데 두셨으니..... 마음이 상석(上席)에 있음을 인하여 자신의 유익(입장,처지)과 이익(성공,성취)만을 앞세우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말과 행동으로는 절대로 공의로움(옳은 일)과 공정(공평,평등)함을 이룰 수 없으며 또 공의와 공정이 없이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그 어떤 것도 구하거나 구원할 수 없으므로 그러한 구원자로서의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것을 몸소 실천하여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첫 발을 디딘 것이 바로 "나귀 새끼" 이며 더 나아가서 믿고 안믿고를 떠나서, 교회를 다니고 안다니고를 떠나서 사람들이 그 본과 자취(벧전2:21)를 본받아 좇아서 따라 행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고전15:23), 속한 자(계14:5),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갈3:27)를 얻고자, 찾고자 하여 두 번째 다시 오시는 것임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그래서 누가복음 11장46절에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하시는 것처럼 이것이 어찌 비단 율법사들에게만 국한된 말씀일까? 우리 사람은 할 수만 있다면 어렵거나 힘든 일 또는 짐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남탓을 하면서 상대방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비방하고 훼방하고 사나워져서 다투고 함부로하고 갑질하기 마련인데 이러한 세상 짐 곧 세상 죄(요1:29)의 원인이나 시발점을 자신의 내면에 있는 체면이나 자존심에서 비롯된 고집과 아집과 심술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인식하며 인정하고 자각하여 스스로를 고치려는 노력 즉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헤아려 이해하며 비방하고 사나워져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하며 함부로하거나 갑질하는 것이 아니라 배려하고 양보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고난이요 죽으심이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6000년 전 모세를 통하여 지켜 행하라고 주신 계명의 핵심인 "서로 사랑하라." 의 지켜 행함의 정석이며 또한 이를 그저 교과서적으로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말과 행동으로 옮겨서 행할 줄 아는 것이 아브라함이 식솔들과 더불어서 고향이었던 갈대아 우르(바벨론)를 떠나 가나안으로 옮겨가는 노정,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서 430년간 고향처럼 살아왔던 애굽을 나와 가나안으로 이동하는 노정과 같은 맥락이니..... 빌립보서 2장3~5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하고 쓰고 있듯이 겸손한 마음 곧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뀌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마치 바벨론처럼, 애굽처럼 상석(上席)에 있는 마음의 자리를 "말석(눅14:9~10)" 으로 옮기고 이동하여야 하며 그 때에서야 그 마음에 진정한 쉼(안식)은 시작되고 진정 살아있음을, 생명을 느끼는 구원의 첫 걸음과 가나안의 노정은 시작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진심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같은 마음으로 나귀 새끼를 올라 탄 것과 같은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세상 짐 곧 세상 죄를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남의 탓으로 돌려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비방하고 훼방하고 사나워져서 싸우고 함부로하고 갑질하는 것이 아니라 헤아려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양보하는 "사랑" 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짊어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12장5절에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하시는 것처럼 우리들은 모두가 다 시온(계14:1~5)에 계시는 어린 양 곧 그리스도와 또 그리스도에게 그 뜻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딸들이요 아들들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왕(임금)은 그 높은 자리에 연연하여 뜻대로 마음대로 좌지우지 칼자루를 휘두르며 자신의 유익이나 이익만을 내세우거나 또 자신의 밥그릇과 배를 위하여 상대방을 잘라버리고 꺾어버리고 밟아버리는 독불장군 같은 왕이 아니라 남의 유익과 이익을 먼저 구하여 헤아려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양보할 줄 아는, 이로써 그 서 있는 곳이 어디라고 할지라도 공의와 공평과 평강(화목,화기애애)에 있어서는 따라올 자가 없는 왕 중 왕이 되게 하려고 그리스도를 앞서서 먼저 몸소 실천하여 본보기를 보이심 곧 나귀 새끼를 타시는 겸손함을 보이셨으며 또한 자신의 죄된 짐, 악한 짐을 남에게 전가(轉嫁)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결하고 이겨낼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소유자로 지으며 만들어서 하나님이 지키라고 명하신 계명을 제대로 지켜 행하는 참된 제사장으로 부르기 위하여 "나귀 새끼" 에 관하여 미리 말씀하신 약속의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