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누가복음 22장24절)
오늘은 누가복음 22장23~24절에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에서 "다툼"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먼저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다툼" 즉 언쟁, 논쟁, 논란이 있게 된 계기와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은 삼십에 팔 제자가 여기에 함께 있음(21~22절)을 이르신 후에 있었던 다툼으로써..... "다툼" 이라 하심은 어떤 일(상황)이나 문제(사건,사고)에 있어서 서로의 이해 관계나 의견의 대립과 갈등과 충돌로 말미암아 상대방과 옥신각신하면서 싸우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나 잠언서 20장3절에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서로가 다툼이 있는 것을 싫어(잠6:16~19)하시므로 멀리하기를 주문하시고 있으니 다툼의 끝은 항상 상대방을 흉보고 욕하고 이간질하게 되고 때로는 폭력, 폭행도 행사하게 되는 아주 나쁜 짓을 하는 결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마무리가 되기 쉽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은 저마다의 입장과 처지가 있고 또 살아 온 환경이나 시대적 배경에 의해서 정립된 기준(관점)이나 성향이나 가치관이나 신념이 다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다 다름을 인정하고 인지하고 자각하여서 서로가 서로를 헤아려 이해하거나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배려하거나 양보해주지 못한다면 거기가 어디가 되었건 천국의 할아버지라고 할지라도 다툼은 항상 있을 수 밖에 없으며 소위 "참 못났다!" 하듯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찌질이 같은 사람만 될 뿐이며.....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의 바로 뒷 구절 26~27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하시는 것처럼 세상(이방) 사람들에게 있어서 큰 자나 높은 자는 소위 "기득권" 하듯이 지도자(대통령,총리,정상... 등등등)나 집권자(공직자)들 또는 재력이나 고위 학력이나 권위(회장,사장,이사,전무,대표... 등등등)가 있는 자들 또는 하다못해 나이가 많은 것(서열,짬바)으로, 성별의 우월성에서 나오는 힘으로 인하여 아무래도 칼자루를 쥐고서 좌지우지 수족 부리듯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자리(위치)가 우러름을 받고 존경을 받으며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 천국에서의 큰 자나 높은 자는 마음을 낮추어 겸손할 줄 알아서 상대방을 섬길 줄 아는 자이며 그 기준과 메뉴얼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곧 그리스도의 마음(빌2:3~5)" 이며 그러나 이러한 크고 높은 자리, 지위에 있으면서 어디 이렇게 하기가 쉬운가? 하는 것이니 사람의 체면과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속된 말로 굽히고 들어가며 굽실굽실하는 것에서 오는 굴욕감이나 모욕감이나 소외감이나 강해 보이지 않는 약한 모습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방보다 더 큰 소리를 내게 되고 더 높은 곳에 있음을 시시때때로 증명하려 하게 되는 것이니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고 죽이려는 노력 곧 십자가의 길(고난,죽으심)을, 그 가르침을 앞서서 몸소 실천하여 본보기를 보이시면서 이것이 "나(어린 양)의 피와 살" 이므로 먹고 마셔야만이 생명(구원)이 있음을, 하나님 나라가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으며 그 피와 살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율법의 (십)계명에서 비롯되었음(눅10:25~28)을 밝히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이러한 율법의 요구(롬8:4)는 입으로 혀로만 떠드는, 말만 앞세우는 것에 있지 않고 오직 행동(행실)으로 옮겨 행할 때에 온전하고 완전하게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이러한 마음으로 바뀌고 변화되지 못한다면 모든 일을 상대방(남)의 탓으로 돌리게 되고 모든 것에 다른 사람을 핑계대면서 자기 앞가림 즉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이나 실수나 혐의는 보지 못하고 상대방만 손가락질하고 눈총을 쏘는 "다툼" 만 있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그래서 우리 사람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살피거나 들여다보아서 추하고 더러운 것들을 버리고 비우고 죽이려하기 보다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면서 내가 아닌 상대방이 그러함을, 일단 나 자신은 배제해 버리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할 것을 기정사실화하게 되지만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는 첫 번째 관점은 다른 사람이 아닌, 상대방이 아닌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주셨기 때문에 제 삼 자 입장에서 나 자신이 그러하진 않는지, 내가 그런건 아닌지를 들여다보아야 하리니 그리스도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던 제자들은 일치감치 다 도망(막14:50)하였고 수제자였던 베드로 역시 나중에는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사랑한다(요21:15~17)고 고백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날에는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막14:72)하였고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도무지 믿지 못하고 의심(요20:25)하였으며 최악으로는 가룟인 유다가 돈 몇 푼(은 삼십)에 그리스도를 팔기까지 하였으니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들도 때로는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부인하는 말과 행동을 하였고 때로는 그 가르침을 의심하기도 하였고 또 때로는 어떤 유익이니 이익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한 양심을 팔아버리기도 하였으니 이에서 어찌 다툼이나 언쟁, 분쟁, 논쟁, 논란이 있을 수 있을까? 다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요 다 독하고 악하고 모질고 괴퍅스럽고 강퍅스러워서 선(善)만을 행하고 죄(罪)를 범하지 않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디도서 3장8~9절에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는 두 번째 관점은 사람은 어느 누구랄 것 없이 자꾸만 죄와 악의 샛길로 빠져서 구덩이인 줄 모르고 늪인 줄 모르고 멸망과 파멸과 사망의 화살과 칼에 맞아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이에서 조심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 선(착하고 좋은 마음)하고 의로운(옳은 행실)일을 함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려고 주신 것으로써 그러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고서 족보(역사)에만 얽매여서 그 이면(속 뜻)에 있는 참 뜻, 참 형상은 보지 못하고 상대방을 정죄하기 바쁘며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하기 바쁘고 남에게 눈총을 쏘기에 정신 없이 다투고 언쟁하고 논쟁하기에 바빴으므로 이제는 이유불문 입(말)으로 범죄치 않기 위해서 잠잠하여야 하며 몸(행동)으로 범죄치 않기 위해서 묵묵히 있는 것이 좋으니 욕심을 내어도(약4:1~2), 살인을 하여도, 억만금이 있어도, 물고 뜯고 치고 박고 싸워도 하나님 나라 천국 곧 구원은 절대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고삐(하나님의 말씀) 풀린 망아지가 되지 않기 위함이며 망나니 칼춤을 추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임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