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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로마서 1장28절)

교훈 안에 2023. 10. 21. 07:05

오늘은 로마서 1장28절에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 에서 "하나님"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하느님)" 이라 하심은 온 우주를 포함하여 이 세상(지구상)의 사람(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곧 하늘(하늘의 신)" 을 의미하여서 모든 존재하는 생명체는 반드시 그 생명체를 낳고 기르는 부모(엄마,아빠)가 있기 마련이지만 "하나님" 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출3:14)" 이시므로 모든 생명체의 실질적인, 절대적인 "부모" 가 되시는 것이며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믿는 소위 "이스라엘(믿는 자)" 이라고 하는 사람들(백성,자녀,성도)만 "아버지 하나님" 이라 부르짖고 외치지 그 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거나 개념 조차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 곧 실질적고 절대적인 "부모" 를 "부모" 라 말하지 않는, 말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하는 합리적인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으니 고린도전서 4장15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하고 쓰고 있듯이 "하나님" 은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영(靈)이시지만 볼 수 있는, 보이는 말씀(요1:1)" 으로 "하나님" 을 드러내고 나타내셨으니 말씀(하나님)이 곧 씨(눅8:11)이기 때문에 그 씨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비(신32:2)와 같은 말씀을 뿌려주기도 하시고 햇빛(눅1:78~79)과 같은 말씀으로 쬐어주기도 하시면서 또 엄마처럼 양육(딛2:11~12)까지 하여주시니 그렇기 때문에 많지 않다고 하신 "아비" 는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알리고 가르치는 스승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아비인 척, 부모인 척 하면서 제대로, 똑바로 자라도록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유익(입장,처지)이나 이익(성공,성취)을 위하여 그 지으신 사람(백성,성도,자녀)들의 마음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마음대로 호리고 꾀어 도적질(가스라이팅)하는 강도나 절도 행각을 벌리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므로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성경 66권 말씀을 통하여 알리고자, 전하고자 하시는 뜻이나 계획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에베소서 4장6절에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시는 것처럼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하는 사람도 다 제각각이고 쌍둥이조차도 그 생각(기준,관점,가치관,성향,이념,신념... 등등등)이 다 다르기 때문에 비록 육신(몸,신체)은 육신을 낳은 부모가 있지만 사람의 심령(슥12:1)을 낳으시고 기르시는 "하나님" 께서 이 혼잡하고 혼돈스러운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어지러운 세상을 오직 한 분 뿐인 "아버지 하나님" 으로 통일(하나)이 되게 하고자 하시는 것이며 그 통일(하나)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오늘 이 시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니.....

그래서 신명기 8장1~2절에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은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하고 쓰고 있듯이 이 말씀은 6000년 전에 기록하신 역사적인 사실(사건)이지만 마냥 역사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서술한 내용이기 때문이며 그 사람이 바로 "모세" 로서 "모세 오경(창세기,출애굽기,민수기,레위기,신명기)"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회과 사람을 향하여 요구하시는 것들을 모세를 통하여 5권이나 할애를 하시면서까지 반복적이고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기록하신 이유는 그로부터 4000년이 지난 후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행3:20~22)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과 사람을 향한 요구(율법의 요구)를 온전하고 완전하게 완성 즉 이루시게(요19:30) 되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후로 또 2000년이 지난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셔서 끝(롬9:28)내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서술하신 역사가 비로소 마무리가 되는 것이므로 모세 오경 곧 모세의 율법의 참 형상(실물,실체)은 6000년 전이 아니라, 역사 속으로 사라져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현재 진행중이라는 것이며..... 그 내용을 들여다 보자면 우리 사람이 제아무리 제각각이고 다 다르다고 하여도 이런 것과 무관하게, 무색하게 모두가 다 한 곳 즉 그것이 질병이 되었건, 사고가 되었건, 재해가 되었건 사망(썩고 죽는 것)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랄 것 없이 불로불사(不老不死), 불로장생( 不老長生)이 있는 이상향적인 유토피아를 꿈꾸게 되며 통일된 다 같은 하나의 마음으로써 이를 위하여 방법도 찾아보고 노력도 해 보지만 100세 라고 하는 생명의 굴레에서 더 이상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길(방법)이 길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런즉 그 노력 역시 헛된 것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니 성경 66권 말씀 안에서 그 이상향적인 유토피아를 "가나안(안식과 쉼의 땅)" 이라 표현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모세가 태어나기 1000년 전이었던 이미 아브라함의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또 그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영원하신 맹세(창17:7~8)이었으며 "영원하다." 는 것은 끝도 시작도 없는, 밑도 끝도 없는 생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끝나기 전에는(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라는 의미이기도 하므로 무엇보다 "꺾이지 않는 마음" 이 중요한 것은 그 "가나안에 관한 영원하신 맹세(히4:8~9)" 가 아브라함의 때도 아닌, 모세의 때도 아닌, 2000년 전 초림의 예수의 때도 아닌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신다고 하신 오늘날에서야 비로소 이루시고 끝내시는 맹세(약속)이기 때문이며 그런즉 "가나안" 들어가는 것이 바로 생노병사(生老病死)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비롯한 고달픔과 괴로움과 외로움과 초조함과 조급함과 근심걱정으로 말미암아 서서히 죽어가는 이러한 사망에서 벗어나 비로소 이러한 사망이 없는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져낸 "구원" 을 의미하니 다만 가나안에 이르기까지는 매마른 광야를 반드시 지나쳐야 하고 그 지나가는 과정에서 버릴 것(죄)은 버리고 비울 것(악)은 비우며 죽일 것(욕심)은 죽이는 시험을 통과하여야 마침내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바라보고 있는, 소망하고 있는 통일된 한 곳 곧 이상향적인 유토피아(가나안)에 도착할 수 있게 되며 그러나 죄와 악과 욕심을 없이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가나안(현재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은 결국 또 치고 박고 물고 뜯고 다투고 싸우며 테러와 전쟁이 있는 지옥 같은 삶(생명)만 있게 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고 죽이는 노력을 앞서서 본보기로 드러내고 나타내 보이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고난,죽으심)" 이며 이로써 그리스도께서 앞서 생명(부활)으로 들어가시고 하나님 우편에서 쉼(안식)을 얻으시고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은 이것이 6000년 전 "모세 오경" 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계획이요 사람을 향한 요구이시며 그 때는 버리지 못하고 비우지 못하고 죽이지 못하여 광야에서 다 사망하여 사라져 버렸지만 이제는 생명과 안식과 구원에 있는 가나안으로 들이시기 위하여 거울과 경계와 교훈으로 삼아서 보이신 것임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4장12절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 16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 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생명" 이시니 잠깐 살다가 죽어가는 하루살이(100세) 같은 생명을 생명이라 말할 수 없음은 영원한 시간(생명)에 비하면 100년은 한 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며 그 찰나와 같이 짧은 시간에 사랑하기도 부족하건만 왜 우리 사람은 하지 말라, 하지 말라, 하지 말라 하시는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비방하고 훼방하고 함부로하고 갑질하는 죄를 범하는 것에 시간을 허비하며 잘라버리고 꺾어버리고 밟아버리는 악을 행하는 것에 허송세월하며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온갖 욕심(재물욕,성욕,식욕,과시욕... 등등등)에 얽매여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정말로 생명을 사랑한다면 이러한 것들을 이제는 버리고 비우고 죽여야 하며 그 십자가의 고난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남게 되는 것은 "사랑" 밖에 없게 되는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무조건(뜻을 다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마음을 다하여) 목에 칼이 들어와도(목숨을 다하여) "사랑(이해,존중,배려,양보)" 으로 행하게 되며 비로소 이제 우리 사람의 마음 속에 남는 것은 "사랑 곧 하나님" 이 되리니 이러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랴마는 "하늘(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는 말도 있듯이 버리고 비우고 죽이는 노력 곧 "십자가의 길" 을 걷는 것에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때가 진짜 왔다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