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오늘은 마가복음 3장5절에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에서 "완악(頑惡)함"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먼저 "완악(頑惡)함" 이라 하심은 사람의 꼬이고 부정적이고 사나운 심성을 인하여 무척이나 꼰대처럼 옹고집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여서 사람이라면 한 가닥 한 성깔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만물의 영장(靈長)으로서의 찐사람이라면 그 언짢고 못마땅한 마음을 스스로 잘 절제하고 제어하고 다스릴 줄 알아서 순화하여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양보할 줄 알아야 하지만 상전이 된 것처럼, 벼슬이라도 된 것처럼 그 마음이 늘 상석(높은 자리)에 있다보니 뜻대로 안되면 미워하면서 분노하게 되고 마음에 안들면 비방하면서 훼방(저주,보복,복수..등등)하게 되며 못마땅해지면 함부로하면서 갑질하게 되고 언짢아지면 자신이 갖고 있는 힘(재력,학력,위력,나이많음,성별우월성..등등등)을 빌려서라도 꼬투리를 잡아 잘라버리고 꺾어버리고 짓밟아버리는 못됐고 나쁘고 악한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게 되니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 마음들이 모이게 되면 심하고 가볍고의 정도의 차이는 사실상 의미가 없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마녀사냥하듯 잡으려 했던 것처럼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려 버리려는 작당모의를 하게 되는 것이 전형적인 "사람의 완악(頑惡)한 모습" 으로써 그 완악함이 바로 죄 범함으로, 악 행함으로 연결이 되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말씀에 그리스도께서 근심하게 되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시편 31편18절에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 하시는 것처럼 우리 사람은 자신의 유익(입장,처지)이나 이익(성공,쟁취) 앞에서는 여차하면 정신줄을 놓아버리고서 눈에 뵈는 것이 없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물고 뜯고 치고 박고 짓밟아버리고 피 터지는 진상짓을 하게 되므로 차라리 입(말)으로 범죄치 않으려 벙어리같이 잠잠(시39:1)하는 것이 좋고 몸(행동)으로 범죄치 않으려 손발이 밧줄에 묶인것 같이 그저 묵묵히 있는 것이 좋으며 이는 하루 아침에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연습과 훈련을 삶 속에서, 생활 속에서 꾸준히 하여야 비로소 굳이 정신줄을 잡고 있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리니 이 모든 것을 앞서서 몸소 실천하여 본보기를 보이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결정체로써 드러나고 나타난 것이 바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이기 때문에 믿는다면, 사랑한다면(요14:23) 그 본과 자취(벧전2:21)를 좇아서 따라 행하여야 하며 그러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 속한 자, 옷 입은 자가 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명(부활)과 안식(쉼)과 구원(구속)을 약속하여 주신 것이며 그 마음 중심에 교만(상전,벼슬)과 완악함이 있고서야 절대로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을뿐더러 믿음의 소망인 구원하고는 상관없는 자가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10~15절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고 쓰고 있듯이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돌직구" 라 하여 빙빙 돌려서 빗대어(비유) 간접적으로 에둘러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군더더기 없이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거나 당황해하거나 민망해하거나 곤란해 할 것에 관하여 전혀 생각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직선적으로 마구 말을 던지는 것, 그리고 뭔가를 예시를 들어가면서 빗대어 에둘러서 말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매너있고 상대방을 생각하는 행동일까? 했을 때에 중요한 것은 사람이 꼬이고 부정적이고 사나운 심성으로 완악하다면 마치 은에 찌끼(사1:21~25)가 생긴 것처럼 깨끗하고 선한 양심에 털이 난 것과 같아서 그것이 무엇(돌직구,비유)이 되었건 보아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며 이로써 그 마음은 일깨우고 돌이킬 수 없으니 절대로 고쳐 행하지 못하는 옹고집쟁이가 되는 악순환만 있게 되며 또한 이러한 사람의 모습(자세)이 어찌 어제 오늘 이야기인가? 하는 것으로써 사람 살아가는 것은 다 똑같아서 시간(세월)만 흘렀을 뿐, 공간(장소)만 바뀌었을 뿐 그 때나 지금이나, 거기나 여기나 별반 다르지 않으므로 여전히 멸망하고 파멸하고 사망하는 재앙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는 것을 잡아내시길 바라며..... 그렇기 때문에 유다서 1장11절에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하시면서 15절에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완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고 쓰고 있듯이 아담의 아들 "가인" 은 몸(마음) 속에 울그락불그락 이는 죄(시기질투,미움,원망,분노..등등)를 다스리지 못함(창4:7)은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 희생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인데 그 완악한 못마땅함이나 언짢음이 결국 동생 아벨을 쳐죽이는 중죄를 범하게 되었으며 또한 이 세상에 돈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마는 돈의 노예가 되어서 양심도 팔아버리는 짓(일)은 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하지만 "발람" 은 불의의 삯(벧후2:15~16)을 얻기 위하여 이스라엘(믿는 자의 통칭)로 멸망의 지름길인 고라(이방신)을 좇게 하였으니 이 모든 일련의 행동의 중심에는 꼬이고 부정적이 사나운 심성의 완악한 사람의 마음이 있고 그 완악함이 사람으로 경건치 않은 일들을 행하도록 부추기는 원동력이 되므로 가인에 빗대어서, 발람에 빗대어서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신다고 하신 약속이 남아있는 우리들에게 거울과 경계와 생명의 교훈으로써 하신 약속의 말씀이니 그러나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이 꼬이고 부정적이고 사나운 심성의 완악함을 제하여 버리지 않는다면 절대로 거울과 경계와 생명의 교훈이라는 것을 볼 수도 들을 수도 깨달을 수도 없다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이사야서 48장2절에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너희는 이를 들을지어다." 하시면서 4절에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 하시며 8절에 "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나니 이는 네가 궤휼하고 궤휼하여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라 칭함을 입은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그마치 6000년이라는 시간(역사)를 통하여 죄와 악(사59:1~2)에서 벗어나고 돌이켜서 고쳐 선(善)과 의(義)의 결정체인 "사랑" 으로 행하기를 시대시대마다, 그 세대세대마다 역사속 여려 인물들에 빗대어서, 사건 사고에 빗대어서 에둘러 표현하여 말씀하시고 성경 66권을 기록하게 하셨지만 우리 사람은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수족 부리듯이 칼자루를 휘두르고 싶어하는 욕심과 교만과 완악함을 인하여 보여줘도 못보고 들려줘도 못듣고 알려줘도 깨닫지 못하는 무지랭이(이치에 어둡고 어리석음)가 되어 사실상 자신의 배(유익,이익)만 위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었으니 먹이 앞에 서슬퍼런 이빨을 드러낸 짐승(딛1:12)과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써 이제는 몰랐으면 모를까 딱 까놓고 알려주시며 보여주심에는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의 무한함을 통하여 일깨우고 돌이켜서 고쳐 행함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생명과 안식과 구원(딤전2:4)에 이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임과 동시에 이는 모든 것을 쉬는 겨울(마24:20)이, 안식(히4:7~9)이 이제 얼마남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