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예레미야 23장2절)
오늘은 예레미야 23장2절에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양무리를 흩으며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에서 "목자(牧者)"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목자(牧者)" 라 하심은 원래 초원에서 뛰어노는 양떼들이 위험한 곳이나 엉뚱한 길로 가지 못하도록 양떼들을 쳐서 관리, 감독하는 양치는 사람을 의미하며 그러한 "목자(牧者)" 에 빗대어 성도들을 양떼(베드로전서 2장25절)로 비유하였을 때에 곁길로 가거나 길을 잃어 엉뚱한 곳으로 들어서서 위험한 데로 가지 못하도록 관리,감독하는 지도자(목사,전도사,선교사,신부님,수녀님,선생..등등)을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목자(牧者)" 라 표현하여 기록하고 있으니...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성도들)을 위하여 "목자(牧者)" 를 세우심은 오직 양떼(성도들)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나는 일이 없도록 하게 하려 하심이 목적인데 오히려 목자들이 자신들의 배(유익,이익,재력..등등)을 채우기 위해서 성도들을 호리고 꾀어 이용하며 두렵게 만들고 있다면, 또 엉뚱한 짓(횡령,배임,폭행..등등)으로 성도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면, 또한 하나님의 뜻을 성도들에게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오히려 구덩이(멸망의 길)나 낭떠러지(사망의 길)인지도 모르고 안내(인도,전도)하여 그 영혼으로 축나게(야위게) 하고 있다면 그러한 목자들을 어찌 하나님께서 보내신, 세우신 "목자(牧者)" 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갖고서 "정말 그러한가?" 하고 꼼꼼히 살펴보며 들여다 보아야 하리니 이 쯤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은 "목자(牧者)" 역시 불완전하기는, 미완성이기는 마찬가지인 부족하고 연약하고 취약하고 실수잘못혐의가 많은 그런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래도 "목자(牧者)" 라면 양떼들을 위하여 더욱더 자기자신을 먼저 쳐서 버릴 것은 버리고 비울 것은 비우며 죽일 것은 죽이는 항상 자기관리가 가장 최우선이어야 하지만 역시 사람인지라 처음에는 순전하고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명감에 불타 충성열심맹세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돈(재력) 앞에, 명예(체면,자존심) 앞에, 한 가닥 욕심(성공,성취) 앞에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또 사람이고 욕심은 사람으로 꼬이고 부정적이고 사나운 한 성깔을 품게 만들어 이제는 하나님의 위(벼슬,상전)에 앉아서 사람들을 좌지우지 수족 부리듯이 칼자루를 휘두르려는 교만이 생기게 되므로 이제는 양떼들(성도들) 스스로가 의구심과 주인 의식을 갖고서 확인하고 관찰하는 것이 좋으니 우리 앞에 사느냐, 죽느냐 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소망인 "생명과 안식과 구원의 문제" 가 달려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5장1~3절에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여기에서 "대제사장" 이라 하심은 성도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예배)와 희생 제물(헌금)을 드리는 일을 하는 사람 즉 "목자(牧者)" 를 의미하며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 라 하심은 실수잘못혐의가 많은 미완성, 불완전한 사람 가운데서 취하였다는 의미로써 그렇기 때문에 자기자신 역시 자기 자신의 죄와 악을 위하여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또 사람이라면 항상 반성할 줄도 알고 돌이켜서 고쳐 행할 줄도 알며 실수잘못혐의에 관하여는 후회할 줄도 아는 것이 사람인데 "목자(牧者)" 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성도들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서 안수(기름 부음)하고 축복(죄사함)을 주는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죄와 악이 있다면 감추거나 숨기기에 급급하지 절대로 반성하거나 고쳐 행하려고 하거나 후회하지 않게 되니 그런즉 시간(세월)이 흐르면서 그 뻔뻔함이나 염치없음이나 구렁이 담넘듯하는 태연함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처럼 단단해지고 더욱더 강해지게 되며... 에스겔서 34장2~4절에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찐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벌려서 멀어지게 만들고 보이지 않는 벽(담)이 가로막게 된 것은 오직 사람의 미우면 미워하고 뜻대로 안되면 분노하며 마음에 안들면 비방하고 못마땅하면 함부로하고 언짢으면 갑질하고 짓밟아버리는 죄와 악(사59:1~2)이므로 죄와 악에 대하여 연약한, 병든, 상한, 쫒기는, 잃어버린 이스라엘(믿는자를 일컫는 통칭)들을 찾아서 먹이고 입히고 싸매줘야 하는 것이 "목자(牧者)" 의 할 일이요 사명이지만 오히려 목자들이 자신들의 배(유익,이익,재력,성공..등등)를 위하여 가장 앞장서서 죄대로 악대로 행하고 있으며 맹신을 강요하며 다스리고 있다면 이스라엘 양떼들은 어디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리저리 헤맬 수 밖에 없음은 불보듯 뻔한 일이며 이렇게 된데에는 자신들의 욕심(성공,성취..등등)에 눈을 감아 보지 못하고 귀가 닫혀 듣지 못하며 그런즉 그 마음이 우준(렘10:21)하여져서 오히려 양떼들을 흩어버리는 부작용이기 생기는 것임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의 뒷 구절 5~6절에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고 쓰고 있듯이 쉽게 말해서 양떼들을 치는 "목자(牧者)" 가 양떼들 앞에서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고 또 자신있게 당당하지 못하다면 무엇을 보아 그 "목자(牧者)" 를 믿고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처음에는 우리 사람과 동일한 죄있는 사람의 모양(롬8:3), 죄의 종의 형체(빌2:7~9)를 입고서 태어나셨지만 여느 사람과 달랐던 차이점은 치고 박고 물고 뜯고 짓밟아버리고 피 터지는 전쟁을 하는 죄대로 악대로 행하였던 것이 아니라 버리고(절제) 비우고(제어) 죽이는(다스림) 십자가의 고난(롬6:6~11)을 통하여 죄와 악을 이겨(요16:33)내시고 해방되어 자유(벗어남)을 얻었으며 비로소 양떼들 앞에 떳떳하고 당당하고 자신있게 병든 마음 고쳐주시고, 상한 마음 싸매주시며 약한 마음 강하게 하시며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떼(눅19:10)들을 목숨을 걸고서 찾아다니셨으니 이것이 진정한 참, 찐 목자(牧者)의 모습" 이니 이로써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신다고 하신 약속이 우리에게 남아있음은 이제는 그리스도에게 붙어서(고전15:23), 그리스도에게 속하여서(계14:5), 그리스도로 옷 입어서(갈3:27) 그 본과 자취를 좇아서 따라 행할 줄 아는 자에게 "목자(牧者)" 로서의 자격과 명분(벧전2:9)을 주고 하심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참된 "목자(렘3:15)" 이며 그런즉 "목자(牧者)" 가 "목자(牧者)" 로서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고서 헤매다니는 사람들 앞에 떳떳하고 당당하고 자신있게 서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쓸고 닦고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