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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시하신 것같이 이 장막(표면적인 것)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교훈 안에 2014. 12. 10. 18:55

오늘은 마가복음 14장41절에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에서 "때"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뒷 구절 43~44절에 "~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하시면서 49절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하고 쓰고 있듯이 성경을 드러내고 나타내서 이루는 "때" 가 되기 전에는 그들(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잡지 아니하였으니 예수님을 잡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의 경륜, 즉 "부활" 이 이루는 때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길 바라며.....

"때" 의 의미는 잘 알고 계시듯이 어떠한 일(사건)이나 그 일의 현상이 일어나는 알맞은 시기나 시절을 뜻하며 특별히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쓰고 있지만 그 "때" 에 관하여 오래 전에 미리 말씀하시고 그 말씀하신대로 그 "때" 가 왔을 때 보고 믿게 하려 함이요 그 "때" 의 최종 목적지는 베드로전서 1장3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 하시면서 8~11절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본 적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본을 받아 그 자취를 좇아 행함으로 거듭났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산 소망의 구원이 있게 하려 하심이니 이 "때" 를 알고자 하여 노아, 아브라함을 비롯한 수많은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이 부지런히 하나님의 뜻을 살폈었다는 것을 잡아 내셨으면 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10~12절에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하고 쓰고 있듯이 그 "때" 가 오기 전에는 부분적이고 초보적인 것, 즉 표면적인 그림자(껍데기) 아래에 매이게 하사 온전히 일깨우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거듭나지도 날 수도 없었으니 바꾸어 말하자면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때는 그 이면에 있는 참 형상 곧 온전하고 장성한 것이 올 때라야 온전히 일깨워 돌이켜 고쳐 행함(거듭남)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4장5절에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하는 것처럼 지금까지는 표면, 즉 겉으로 드러나 있고 앞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며 이를 좇아 행하였지만 그 때에는 그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그 이면(異面), 즉 감취어져 있고 숨어 있는 것을 살피고 헤아려 판단하기 보다는 관용하며 배려하고 비판하기 보다는 용납하며 양보하는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 더욱 우리의 산 소망인 구원에 가깝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