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사야 42장4절에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에서 "교훈(敎訓)"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먼저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그" 라 하심은 앞 구절 1절에서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하고 쓰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택하신 "그" 를 말씀하시는 것이며 "그" 는 잘 알고 계시듯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뜻과 계명 곧 두루마리에 기록하신 말씀들을 지켜 행하러 오신(히브리서 10장7절)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며 더 나아가서 첫 번에 오셨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과 계명 곧 하늘의 지혜(요한복음 3장31~32절)와 명철과 교훈의 말씀을 알리시고 전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온전히 지켜 행하셨으며 그 지켜 행하심의 증거(증명)로써 "부활" 하심을 우리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보았으며 들었으며 읽었으며 또한 두 번째 다시 오신다고 약속(언약) 하셨으니 그 약속을 믿으며 이에 의지하여 그 전하여 준 바 순종의 말씀의 본(로마서 6장17~18절)을 받아 그 자취를 좇아 지켜 행하여야 할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고린도전서 15장23절) 곧 많은 아들(아들들)들 또한 "그" 가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교훈" 에 관하여는 앞서 기재했던 글 중에서 살펴 본(2014년9월9일자,14년3월18일자,2013년5월6일자) 적이 있었지만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알고보니 "그리스도 교훈" 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 교훈을 주는 글과 말과 지침서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섬들 곧 사람들이 그를 통하여 긴 터널과 같이 앞이 보이질 않고 한 치 앞도 장담할 수 없는 삶에서의 절망스러운 부분에서 어떤 희망과 소망을 바라고 또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그의 교훈을 앙망하게 되는 것은 더는 이 못됐고 나쁘고 악한 면(面)의 세상에 이리 치이고 저리 코박혀서 허우적되지 않으려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 세상은 공평과 정의 곧 공의로 세워지고 만들어질 때에 비로소 세상다운, 사람다운 삶을, 진정한 "생명" 이라 말 할 수 있기 때문이니 바꾸어 말하자면 지금까지 우리 사람(인생)이 얼마나 자기 자신의 유익(가치관,기준,철학)과 이익(입장,처지)을 위해서 타인의 유익과 이익은 쳐다보지 않았으며 자기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라면 얼마나 자기 자신의 욕심쪽으로 무게가 쏠리고 기울며 치우였었던가? 하는 것을 인정하기 싫지만 반증하는 것임을 잡아 내시길 바라며.....
그래서 어찌보면 우리 사람의 생명과도 직결될 수 있을 정도로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할 "교훈" 이 그져 피상적으로 여기거나 교과서에나 나오는 좋은 말 쯤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숨 쉬기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공기와 같은 반드시 꼭 필요한 생명의 "교훈" 이 되기 위해서는 그 근본 바탕과 근원이 "나" ,"내" 가 먼저가 아니라 "다른사람", "남", "상대편" 곧 "이타심(利他심)" 으로 먼저 돌아보고 살펴 볼 수 있는, 이러한 것이 우선시 되었을 때에라야 생명이 있는 지혜(방법,방향)가 발휘가 되며 오죽하면 요한이서 1장5~6절에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하시면서 9절에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이 서로 사랑(인애,온유,자비,양선,긍휼,관용,배려,양보)하기를 바라고 원하신 것이 어찌 어제 오늘 이야기인가? 태초부터 처음부터 보이신 하나님의 뜻이요 계명이었지만 우리 사람은 말로만 외치고 부르짖었을 뿐 그 언약을 어기고 패역(호세아 6장6~7절)을 행하였으며 그 악함으로 사랑하려하기 보다는 미워하고 비방하고 훼방하고 다투고 사나워져서 함부로 하며 극에 달한 악함으로 살인(요한일서 3장11~12절)하기에 이르렀던 것이 부끄럽지만 우리 사람의 모습이니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장구한 생명으로 인도해주는 "그리스도 교훈" 으로써 모자라도 안되고 너무 지나쳐서도 안되는 딱 더할 나위 없을 정도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교훈 곧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기를 죽기까지 하신 것은 상대편(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과 율법사들과 유대인들)이 자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좌지우지 수족 부리듯이 하고 싶은 욕심과 뜻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았을 때의 어떤 못마땅 함에, 미워서, 싫어서, 마음에 안 들어서 비방하고 다투고 시기하고 훼방하고 침 밷고 때리고 사나워져서 함부로 한다고 하여 똑같이 아니면 더 큰 소리로 싸우고 다투신 것이 아니라 다면 상대편이 하나님의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말씀을 헤아려 이해하지 못하고 몰라서 이를 행할 수 없어서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 있는 사랑 곧 인애와 관용과 온유와 긍휼한 마음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오히려 용서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눈물로써 올리셨으니 이는 하나님께 있는 사랑 곧 그 뜻과 계명을 온전히 지켜 행하시기 위함(히브리서 10장7절)이요 우리는 그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자세)을 더도 덜도 말고 그 본과 자취를 좇아서 행하여야 하는 것이 진정 그 교훈을 앙망하는 것임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3장1~3절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자기도 함께 갇힌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하시면서 9절에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우리 사람의 백세 인생은 그야말로 손님처럼 왔다가 떠나가는 삶이며 그 속에서도 욕심에 이끌려 못됐고 나쁘고 악한 죄에게 갇혀서 종과 노예로 학대 받으며 생을 마감하는 것이 어느 누구라고 예외가 있었을까?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교훈의 가장 중심에는 "사람 사랑" 곧 서로가 서로에게 갇혔던 것과 학대 받았던 "인지상정" 의 마음으로 대접, 즉 그 처지와 입장과 상황과 사연을 헤아리고 이해하여 미워하고 비방하고 사나워져서 다투고 함부로하기 보다는 똑같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오히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서 관용하고 용납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악을 끊임없이 용서하심과 같이 그 은혜를 생각하여 용서함이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는 것이며 다른 교훈에 끌리지 않는 것임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