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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

교훈 안에 2018. 4. 6. 19:09

오늘은 사도행전 3장13절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먼저 오늘 본문의 말씀은 (태어)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그리스도의 제자요 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이 주의 이름으로 걷게 하심(6~8절)을 보고 사람들이 기이히(10~11절) 여기며 놀라니 12절에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하고 쓰고 있듯이 우리 사람(인생)은 모두가 온전치 못하고 부족하며 자기 자신도 잘못하고 못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온전케, 완전케 할 능력이나 기술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없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하지만 하나님께서 한 사람 "예수" 를 통하여 온전케, 완전케 되는 방법(지혜)을 전하고 알리게 하셨으며 또한 우리 사람은 온전치 못하고 부족하고 잘못하고 못났기 때문에 모두가 다 가지각색 병을 갖고 있는 병자들로써 완전히 낫게 되는 비법(지혜,지식)을 한 사람 "예수" 가 몸소 실천하심으로써 본(本)으로 보이셨으니 잘 알고 계시는 "십자가의 도(고린도전서 1장18절)" 이며 그런즉 "그리스도" 로써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종" 예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의 의미는 마가복음 12장26절에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는 것처럼 여기에서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 은 그 앞 구절 18~25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바 "죽은 자의 부활" 을 뜻하며 그런즉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 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즉 "이스라엘" 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여 주신 것이므로 반드시 "이스라엘" 이 되기 위하여 노력(훈련,연습)하여야 한다는 것을 뜻하니 "이스라엘(Israel)" 에 관하여는 앞서 기재했던 글 중에서도 살펴 본(2017년4월1일자,2016년10월15일자,2015년12월12일자,15년9월10일자) 적이 있었지만 지중해 남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중동 국가 중에 하나인 그 "이스라엘" 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먼저 잡아 내시길 바라며.....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 이 믿음의 조상(로마서 4장16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히브리서 7장1~2절에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이라 하심은 모세의 때에도 "그리스도" 를 암시하는 말씀(고린도전서 10장4절)이 있는 것처럼 "멜기세덱" 이 그 시대 그 당대에 "그리스도" 이심을 의미하며 그러한 멜기세덱을 아브라함은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일깨우고 돌이켜서 고쳐 행하였으며 이를 말해주고 있는 부분이 일체의 십분의 일 드림 즉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두어서 그 가르침대로 행하였음을 뜻하며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멜기세덱은 하나님께 있는 영원무궁한 생명과 구원과 안식으로 복을 빌어 주셨으리라. 또한 그러한 하나님과 멜기세덱을 믿기 때문에 아들 "이삭(히브리서 11장17절)" 도 살리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제단에 희생 제물로써 드렸으며 하지만 하나님께서 받고자 하시는 것은 어떠한 제물(짐승의 피,물건,돈... 등등등)이 아니라 사람의 온전히 드려지는 마음이지만 어찌되었건 그 시대에 하나님께 보일 수 있었던 믿음의 방법이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죽은자의 (다시)살아나심" 의 약속은 "이삭" 으로부터이며.....

로마서 9장7절에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 11절에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 13절에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시면서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말고도 "이스마엘(창세기 16장15절)" 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즉 "죽은 자의 살아남" 에 대한 산 자의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줄 자손은 "이삭" 이었으며 "이삭" 을 통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 이 태어났기 때문이며 이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미리 택하심을 따라 된 것이니 그 미리 택하심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다시 말해서 오직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심으로 부르시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사랑" 은 온유와 인애(자비)와 관용(용서,용납)과 화평(배려,양보)과 긍휼로 행할 줄 알 때에 효력이 발생하니 바꾸어 말하자면 "긍휼" 은 이사야 55장7절에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하고 쓰고 있듯이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 중에 하나님께로 나아오고 싶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자신더러 "나는 악인이야!", "불의한 자야!" 라고 말하거나 그리 느끼며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우리 모두는 동전 앞뒷면과 같아서 좋은 때는 마음에 있는 좋은 것(사랑,겸손,관용,양보,배려... 등등등)으로 베풀다가도 못마땅하고 언짢아지고 마음에 안 들고 기분이 나쁠 때는 여지 없이 미워하고 비방하고 훼방하고 불평하고 사나워져서 다투고 윽박지르고 함부로하기를 서슴치 않으니 과연 이러한 이중성에 선하다고 해야 할까? 악하다고 해야 맞을까? 그리고 의로운 사람이라 해야 할까? 불의한 자라 말해야 할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이며 앞서 그리스도께서 이를 짊어지고 고난의 길을 걸으시며 못 박으시고 죽으셨으니 우리 또한 그 발자취를 좇아서 지켜 행하여야 하나님께로 온전히 나아오는 자이며 악에서 떠나고 불의에서 벗어난 자라 말할 수 있으며 이로써 하나님께로 긍휼하심을 입은, 긍휼히 여기심으로 야곱의 자손 즉 "이스라엘" 이라 칭하여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가장 먼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즉 사람과 싸우고 다투어서 이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의 육체의 여러 정욕(욕심)과 싸워 이기심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생명(부활)과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이스라엘" 이 되신 것은 "그리스도" 이시며 이를 온전히 드러내고 나타내어 이루시기 위하여 두 번째 다시 오시는 것임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