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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사도행전 6장6절)

교훈 안에 2018. 12. 15. 10:29

오늘은 사도행전 6장6절에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에서 "안수(按手)"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안수" 는 잘 알고 계시듯이 성직자(목사,신부)들이 성도들에게 예배식(세례,기도) 때 또는 성찬식, 부흥회, 대회(감사절,부활절,성탄절) 때 그리고 병 치유 목적으로, 각종 수료식 때... 등등등을 통하여 머리에 손을 얹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주는 것을 "안수" 라 하며..... 하지만 분명히 바로 잡아야 할 것은 사람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한 가닥 욕심이 없는 사람이 없고 그 욕심 즉 부(재력)와 명예(권위)와 권세(권력)를 성취하고자 쟁취하고자 하는 마음을 먼저 앞세우다보니 그러한 욕심이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위하는 마음이 때로는 못됐고 나쁘고 악한 꾀나 방법으로 할 때도 있고 또 때로는 다른 사람(상대방)에게 부당하고 불공정하고 불의한 방법을 사용하여 궁지로 내몰고 갈 때도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법과 계명을 지켜 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나보다는 남은 낫게 여기는 "이타심(利他心)" 으로 새롭게 변화되고 바뀌어야 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 앞에 남의 유익(고린도전서 13장5절)을 먼저 구하여 이를 헤아리고 살펴 배려하고 양보하기에는 나 자신의 유익과 이익과 욕심을 먼저 챙기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몸에 배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에게 원하시고 바라시는 모습(자세)과는 많이 멀고 하나님을 잘 몰라 안 믿고 못 믿는 저 세상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으니 모두가 다 그냥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욕심에 이끌려 때로는 다른 사람을 속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고 싶은 욕심으로 인하여 뜻대로 되지 않거나 못마땅한 구석이 보이면 이내 언짢아져서 미워하고 비방하고 훼방하고 사나워져서 다투고 함부로하기를, 무례히 행하기를 서슴치 않았으니 자신의 죄 즉 마음조차도 다스리지 못하고 조절할 수 없고 제어가 되지 않는데 누가 누구의 죄에 상관할 수 있으며 죄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그 어떤 축복의 말이나 "안수" 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의미도, 유익도 없으니 하나님의 법과 계명을 잘 지켜 행한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에게 주고자 하시는 은혜의 선물이요 축복은 하나님께 있는 생명(부활)과 안식과 구원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라며..... 또한 그렇다고하여 자신의 생명이나 유쾌한(사도행전 3장19절) 미래에 대한 선견지명이 있어서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짐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당장 눈 앞에 일어날 ,닥칠 그 어떤 상황도 볼 수 없고 불시에 찾아오는 어떤 불행이나 사고, 질병에 의연하게 대처가 되지 않으니 불안함과 조급함에 허둥대기 바쁘며 그리고 무방비 상태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여러 재해(천재지변, 인재의 재난)를 예견하여 이를 막을 수 있다거나 최소한 준비라도 할 수 있도록 타당한 이론이나 논리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다시 말해서 우리 사람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길 앞에 놓여진 그 어떤 것(생명,미래,불행,사고,재해... 등등등)도 해결할 수 없고 그냥 받아들일 수 밖에 없고 당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므로 이러한 "내 코가 석 자야!" 하는 동등한 입장에 서 있으면서 누가 누구를 위하여 "안수" 를 한다는 것은 그져 형식적인, 피상적인, 표면적인 의미 즉 초보적이고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며 이제는 이러한 것에 머물러 있었던 때가 아주 오래되었므로(히브리서 5장12절) 아직도 이 초보적인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를 답습하고 가르치고 지켜가며 행하고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며 이제는 이러한 교훈의 터(히브리서 6장2절)에서 한 걸음,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온전하고 장성한 의미 곧 "안수" 의 참 형상(실상)을 알아(깨달아)야 하며 이전의 몰라서 못하였 것은 하나님께서 책하지 않으시며 허물치 않으시지만 어딘가에서 알리며 전하고 있다면 이제는 귀 담아 들어보고 일깨워 돌이켜서 고쳐 행할 때(사도행전 17장30절)라는 것을 잡아 내셨으면 한다.그래서 이러한 우리 사람(인생)을 보호하여 하나님께 있는 영원무궁한 차원과 영역의 생명과 안식과 구원으로 인도하며 안내할 수 있는 유일한 스승이요 선생이요 지침서는 오직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안에 모두 기록하고 있으며 이를 우리는 "보혜사(保惠師)" 라 하며 사람이 "보혜사" 가 아니니 사람은 어느 누구나 다 동등하며 하나님 앞에 다 마찬가지로 똑같을 뿐,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속 뜻, 이면(裏面)에 들어있는 참 뜻을 발견하며 헤아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몫이며 이는 우리가 온전히 선한 양심(베드로전서 3장21절)으로 바뀌고 변화되어야 헤아리며 살펴 이해할 수 있는 눈이 생겨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선한 양심" 은 자신의 유익과 이익과 욕심을 먼저 생각하고 앞세우며 내세우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버리고 타인 즉 상대방(남)의 입장과 처지와 사연과 상황을 먼저 헤아리고 구하여 살필 줄 알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생길 수 있으며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참된 사랑의 기술과 방법(지혜)" 을 기록한 것으로 "사랑" 의 기본 바탕이 "선한 양심" 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한다.그러므로 이사야 61장1절에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 하고 쓰고 있듯이 주 여호와의 신(神) 곧 성령(누가복음 4장17절)이 임하시고 내리시기를 기름 붓듯하시는 것이 온전하고 장성한 참 형상의 "안수" 이며 신(神) 곧 "성령" 이라 하심은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고 해결하기 어려워 그져 받아들일 수 밖에 없으며 당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우리 사람(인생)을 그러한 파멸(패망,멸망)과 사망으로부터 보호하여 생명과 안식과 구원의 길을 논리적으로 제시하며 대처하고 준비케 하는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며 알리고 전파할 수 있는 말씀이 곧 "보혜사 성령" 이며 그러한 신(神) 곧 성령을 하나님께서 기름 붓듯(사도행전 10장38절) 부으시는 "안수" 를 하신 것은 그리스도이신 예수이시며 그리스도께서 그 받으신 기름부음(안수)의 아름다운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리시고 전하셨으며 이를 받아들일 줄 알고 헤아릴 줄 알아서(깨달아서) 일깨우고 돌이켜 행위(행동,행실)를 고쳐 행할 줄 알게 되는 그 사람들도 그리스도께 "안수" 받은 것이며 이를 온전히 이루시기 위하여 두 번째 다시 오시는 것이며 이 성령의 음성(소식)을 헤아려 그 이면에 담긴 속뜻과 참 뜻을 알아서(깨달아서) 새롭게 바뀌고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들의 몫이며 이를 지금까지 우리는 "인면수심(人面獸心)" 하듯이 그동안 짐승 옷을 입고 있었던 것에서 벗어나,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라고 말씀(갈라디아서 3장27절)하시는 것이며 이 또한 기름부음으로 옷 입었으니 그리스도께로 받은 "안수" 이며 그런즉 더 나아가 우리가 그리스도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요 "안수" 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고린도후서 1장21절)임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