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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교훈 안에 2019. 1. 16. 18:13

오늘은 사도행전 7장2절에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 에서 "아브라함(Abraham)" 에 대하여 히브리서 7장과 연계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아브라함" 에 관하여는 앞서 기재했던 글(2018년4월6일자,18년2월21일자,2016년8월12일자,16년1월19일자,2015년2월17일자)에서 살펴 본 적이 있었지만 우리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을 알아보고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그져 역사적 실존인물 차원에서 지식적으로 그가 행하였던 여려 행적을 아는데서 그치고자 함이 아니라 만약에 그러한 이유와 목적이라면 오늘 본문의 말씀 뿐만아니라 4복음서에서도, 바울 서신서에서도 여러번 기록하여주지 않았을 것이라.

로마서 16장25~26절에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 하고 쓰고 있듯이 그 표면적, 피상적인 "아브라함" 이라는 이름 이면(裏面)에 담겨있는 즉 영세 전부터 감취어져 있던, 숨겨져 있던 "그리스도" 를 찾아내고자 하여 "아브라함" 에 대한 말씀들을 기록하여 주신 것이며 하지만 만일 이를 알았다면 유대인들을 비롯한 대제사장들과 율법사들이 요한복음 8장52~53절에서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뜻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말들을 내밷지는 않았으리라. 5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 마지막 때에 두 번째 다시 오신다(임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그 때 그 시대 그 세대의 유대인들과 똑같이 동문서답을 하는 양상이 된다면 시간만 흘렀을 뿐, 공간만 바뀌었을 뿐 그 때나 지금이나, 거기나 여기나 별반 다른 것이 없으리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태어나서부터 살던 메소보다미아 곧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노정을 걸었으며 여기에서 "가나안" 아브라함의 때에 이루어질 약속의 말씀이 아니라 먼 훗날 나타나고 드러나게 될 온전한 "안식(히브리서 4장9~11절)" 을 의미하며 "안식" 에 들어가는 그 날이 바로 온전한 "안식일" 이며 그러나 그 약속은 아브라함의 때에도, 모세의 때에도, 여호수아의 때에도, 다윗의 때에도, 솔로몬의 때에도, 첫 번에 오셨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때에도 이루고자 하심이 아니라 히브리서 11장39~40절에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는 것처럼 첫 열매 곧 처음익은 열매가 드러나고 나타나게 될 세상 끝, 마지막 때, 그리스도께서 두번 째 다시 오신다(임하신다)고 하신 그 때에 온전히 이루고자 함이니 그런즉 아브라함의 가나안 노정은 우리에게 거울과 경계(고린도전서 10장11절)와 교훈(로마서 15장4절)으로 기록하여 주신 것임을 잡아 내셨으면 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7장1절에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하고 7절에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은 오직 멜기세덱이며 멜기세덱은 2절에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하 "그리스도" 밖에 없으니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의 때에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보다도 더 크고 높은 이가 멜기세덱으로써 바꾸어 말하자면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를 말하고자 함이지 한 사람, 한 육체(혈통,족보)의 "예수" 에 관한 말씀이 아니며 그런즉 "그리스도" 에 관하여 브리서 7장3절에서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알리고자 전하고자 하시는 것이 한 사람 "예수" 의 육적 계보(족보, 혈통)에 대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마태복음 3장9절)이 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하며 다만 히브리서 6장20절에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멜기세덱이 그리스도로써 아브라함에게 생명과 안식과 구원에 대한 복을 빌어 준 것과 같이 한 사람 "예수" 또한 육적 계보(족보)을 좇아서 되신 것이 아니라 육적 계보를 좇아난 제사장이라면 이미 율법에서 정해놓은 "레위 지파", "레위 족보" 의 제사장이 있기 때문이며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에게 요구하시고 바라시는 것이 율법의 의문(儀文)을 좇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생명의 능력을 좇아서 되는 것이며 생명의 능력은 오직 율법의 완성인 "사랑" 을 몸과 마음과 눈과 손과 발로 온전히 지켜 행할 수 있는 믿음 위에 있을 때에 발휘되며 그런즉 멜기세덱과 같은 반차(등급,신분,계보)를 좇아서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사도행선 2장36절)가 되셔서 우리들에게 생명과 안식과 구원의 복을 빌어주시려고 죄 있는 사람의 모양, 죄의 종의 형체로 오셔서 이를 버리고 비우고 죽이는 노정 곧 십자가의 길 곧 그 도(道)로 행하신 것임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7장15~17절에 "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영원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하고 쓰고 있듯이 오늘날에도 이미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 즉 율법의 의문(儀文)을 좇아서 죄를 속하려는 속죄, 깨끗케 하려는 세례를 위하여 예(예배)와 제(헌금)를 올리는 형식과 절차를 좇아 제단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있으며 하지만 이러한 것으로는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있는 생명의 능력(생명력)은 이러한 형식과 절차를 좇아서 행한다고 하여 제하여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잘못되고 어그러진 것들을 일깨우고 돌이켜서 고쳐 행함에 있으니 쉽게 말해서 사람의 행동으로 나오는 모든 못됐고 나쁘고 악한 꾀와 죄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마음을 고쳐서 새롭게 변화되고 바뀌어야 되는데 마음으로 지은 죄를, 마음으로 죄를 지어서 행동으로 옮기고 있으므로 몸을 닦고 씻는 의식(세례식,성찬식,부활예배,성탄예배,추수감사예배)으로는 절대로 마음의 더럽고 추한 것들을 씻으며 깨끗케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죄 있는, 죄의 종의 형체를 입은 한 사람 "예수" 가 죄를, 악을 없이하려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고 싶어하는 욕심을 못 박아 버리고 비우려 죽으시는 십자가의 도를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으니 우리 또한 그 보이신 본을 좇아서 지켜 행하여야 하며 이것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주었던 참 모습이며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육체의 정욕(욕심)으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미워하고 불평하고 비방하고 훼방하고 사나워져서 다투고 함부로하고 무례히 행하기를 서슴치 않는 죄와 악을 버리고 비우고 죽일 수 있어야 약속에 대한 증거만 받았던 아브라함과는 다르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복 빌어주심의 생명과 안식과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