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창세기 2장19~20절에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 에서 "이름"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름" 이 주어져 있으며 그 "이름" 으로 인하여 존재함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주어진 "이름" 이 주는 의미는 개별적이고 독창적이기 때문에 존중해야 하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더욱이 생명이 있는 생명체에게 주어진 "이름" 이 주는 의미는 "생명에 대한 존엄성" 그 자체이기 때문에 하찮은 풀이나 시들어 없어져 갈 잡초라 할지라도 생명에 대한 존엄성의 차원에서 함부로하거나 자고(自高)해서는 안되니... 그러나 지금 우리 사람의 현실적인 모습은 모든 생물의 으뜸으로서, 만물의 영장(靈長)으로서 모든 생물을 다스리고 존중한다기 보다는 그 주어진 이름들이 무색하게 천적이 없는 최상위 포식자가 되어 사람의 유익과 이익과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지나치게 남용하며 무시하고 멸시하고 업신여기면서 함부로하는 억압(포획,남획)하고 있으니...
중요한 것은 로마서 5장14절에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하시는 것처럼 "아담" 은 "표상" 하듯이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이름으로서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이 함부로(미워하고 비방하고 훼방함)하며 갑질하기를 서슴치 않는 죄악을 행함으로 인하여 또 자기 자신의 유익과 이익과 욕심을 위해 행하는 포식자의 모습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로마서 8장19~21절에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시는 것처럼 모든 생물들, 피조물 또한 사망이 왕노릇하며 썩고 죽는 허무한데 굴복하게 되었으니 비록 말 못하는 생물들이지만 그들의 고대하는 것은 우리 사람을 통하여 사망과 멸망(파멸)에 이르도록 다스려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 하는 온전한 사람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 곧 생명과 안식으로 다스려 줄 하나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것이며 그 때에야 비로소 그 모든 피조물들에게 주어진 이름의 참된 가치와 효력이 생긴다는 것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그래서 그 오실 자의 표상 곧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살펴보자면 마태복음 1장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고 쓰고 있듯이 2000년 전 유대 땅에 목수의 아들이었던 "예수" 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 태어났으니 "예수" 또한 우리 사람과 똑같은 죄있는 모양(로마서 8장3절), 죄의 종의 형체(빌립보서 2장7~8절)를 입고 태어났으며 여느 사람, 일반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 죄의 모양과 그 형체를 계속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죄에게 매이고 악에게 잡혀서 행하는 것에 그 마음이 상하여 고뇌하게 되었고 계속하여 죄와 악에게 져서 종이 되어 끌려다니면 사망이 왕노릇하여 썩으며 죽게 되니 하나님께서 온전히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거처를 함께(요한복음 14장23절)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 말미암아 죄와 악을 벗어 버리고 비워 버리려고 피땀눈물의 노력 곧 고난을 겪으셨으며 죄와 악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의(義)에 대하여 자유롭게 행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며 의(義)에 대하여 자유로워질 때에 비로소 생명에 이르게 되며 하나님의 생명에 이르르는 것이 곧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에 히브리서 7장2절에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하시면서 16절에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 하시는 것처럼 의(義)대로 행한다는 것은 그 근본이 다른 사람의 유익(입장,처지)과 이익(기준,관점)을 먼저 헤아리고 이해하고 존중하여 배려하고 양보하는 "사랑" 에서 시작되므로 그리스도께서 그 겪으신 고난을 통하여 만약에 유대인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미워하고 때리고 비방하고 침 밷고 업신여기는 유대인들의 군중심리로 십자가에 죽게 되었을 때에 잠잠하거나 묵묵히 있지 않고 그들과 똑같이 되어서 악한 마음으로 다투며 똑같이 미워하고 비방하고 함부로하고 똑같이 되어서 비방하고 때리는 죄를 범하며 맹수 같이 싸웠으리라. 하지만 영원무궁한 차원의 생명의 능력은 의(義) 곧 사랑으로 행할 때에 비로소 발휘가 되고 효력이 발생하며 한 사람 "예수" 가 의(義)와 사랑으로 행하기까지는 죄와 악으로 행하려는 육체의 욕심과 소욕을 버리고 비우는 고난이 없이는 되지 않기 때문에 부단히 피땀눈물을 흘리는 노력을 하였을 것이며 그 결과는 구원의 근원(히브리서 5장7~9절)이 되셨으니 이렇게 하심은 요한복음 20장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그리스도, 임마누엘, 의(義)의 왕이라는 이름은 그냥 생기는 것도 아니요 거저 주어지는 것도 아니요 피나는 노력, 눈물나는 고뇌에서 얻어진 값진 이름으로서 이는 그리스도를 당신을, 자신을 위하심이 아니라 많은 아들(히브리서 2장10절) 즉 우리들 또한 그 이름으로 나타나게 하려 하시려고 앞서서 본보기를 보이신 것이며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의 "이름" 이라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