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창세기 42장18절에 "삼일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다."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먼저 "경외하다." 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들어 모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두렵고 떨리는 이유는 과연 내가 제대로 받들어 모시고 있는지 조심스러운 마음이 있기 때문이며 그러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靈)이시므로 "경외한다." 는 것은 다분히 추상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제대로, 올바르게 짚어야 할 이유가 있으니 잠언서 8장1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말로써, 입으로써, 혀로써 그 이름을 외친다고 하여 부르짖는다고 하여 경외하는 것이 되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고 선(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우리 또한 악을 미워하여서 모든 교만과 거만과 그에 따른 악한 행실과 독하고 모질고 마녀사냥하듯 사람을 잡는 말, 비방하는 말을 내밷지 않아야 하리니 악(惡)이라 함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여 자기의 마음의 자리(지위)를 높여서 아래로 보며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수족 부리듯이 하려는 교만하고 거만하고 오만한 마음이 되거나 미우면 미워하고 뜻대로 안되면 분노하며 마음대로 안되면 비방하고 사나워져서 다투며 못마땅해지면 함부로하고 언짢아지면 갑질하는 죄를 범하는 것으로써 이러한 것을 멀리 하고 마음에서 제하여 버려야 그 사람을 진정 "하나님을 경외한다." 라고 말할 수 있으니 악(惡)은 우리가 범하는 죄에서 비롯되고 선(善)은 사랑에서 비롯되므로 호세아 6장6절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시는 것처럼 이 말씀은 마태복음 9장, 12장에서도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하여 기록하고 있으니 다시 말해서 인애, 긍휼, 자비는 사람이 사람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절대로 행할 수 없는 선행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에게 예배와 헌금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돈을 원할까? 진정한 산 제사는 겉모습을 경건하게, 거룩하게 하는데 있지 않고 내면에 있는 죄와 악을 제어하고 절제하고 다스릴 줄 알아서 의(義)와 선과 사랑으로 행할 줄 알때에 그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며 오직 악을 미워하여 선으로 행할 줄 아는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함에 근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그 시대에 방주를 예비한다는 것은 그 세대에게 주어진 생명과 안식과 구원을 얻는 길이었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인자의 때 역시 노아의 때(누가복음 17장26~27절)와 같다라고 한다면 노아가 6000년 전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함이 어떤 것인지를 반드시 알아야 하리니 그 때 그 시대에도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그 계획함이 항상 악한 것(창세기 6장5~6절)을 노아는 보았고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결국엔 멸망과 파멸과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을 노아는 깨닫게 되므로 노아 자신은 죄악을 멀리하며 마음에서 제하여 버리고 오직 인애하고 긍휼하고 자비하며 온유하고 관용하는 선과 사랑으로 행하기에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마음(누가복음 10장27절)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충성과 열심을 내었기 때문에 그 믿음이 노아로 하여를 방주를 만들게 하였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으며 아브라함 역시 창세기 22장에서 가장 귀한 독생자 아들 이삭을 희생제물로 드리려고 할 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 경외하심의 믿음을 보았으므로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으니 우리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거기나 여기나 선을 사랑하는 신념과 믿음을 갖고서 서로가 서로에게, 사람이 사람에게 그 입장과 처지를 헤아려 이해하고 존중하며 관용으로 배려하고 양보하는 사랑으로 행하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체면과 자존심을 목숨처럼 여기고 체면 때문에 맹수처럼 다투고 싸우고 피를 보며 자존심 때문에 함부로하고 갑질하면서 잘라버리고 꺾어버리고 밟아버리는 죄와 악으로 행하기를 서슴치 않으니 그것이 어찌 하나님을 경외하여 믿는다고 하는 믿는 자라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잘 몰라 안믿고 못믿는 저 세상사람과 차별이 있고 구별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죄를 범하여 악을 행함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가 일반이기 때문에 그 가는 길 또한 같은 방향일 수 밖에 없으니 잠언서 14장2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하시는 것처럼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함으로써 먼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행할 줄 알 때에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써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여 생명으로 옮기며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이사야 11장1~3절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 하고 쓰고 있듯이 "이새" 는 다윗왕을 낳은 다윗의 아버지이며 그 줄기와 뿌리는 바로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유다" 를 의미하며 또한 그 싹과 가지는 사도행전 13장22~23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를 의미하니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하심에 관하여 기록하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을 말하고자 하여 기록하신 말씀이 아니라 먼 훗날 그 모든 것의 참 형상으로 드러나고 나타나게 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경외하심의 본보기를 보이심으로 부활에 참예하신 첫 번째 사람으로서, 구원의 근원이 되신 마지막 아담으로서 우리 또한 그 본과 자취를 좇아서 하나님을 경외하여야만이 부활에 참예하며 구원을 얻을 수 있을 알리고자 하여 요셉의 하나님 경외하심에 빗대어 하신 말씀이니 우리 사람은 "너는 무슨 낙으로 이 세상을 사니?" , "어떤 즐거움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니?" 하는 질문에 부자되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치열하게 뛰고 달리고 싸우고 고생한다고 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삶 속에서, 생활 속에서 하나님 경외함을 낙으로 삼고 치열하게 싸워 이기기 위하여 마음속에 있는 죄와 악을 멀리하고 제하여 버리기 위하여 피땀눈물의 노력 곧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셨으니 그런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했는지 안했는지 무엇으로 알수 있는가? 한다면 오직 하나님께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심과 같이 비록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죄를 범하지 않는,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이제는 그 죄와 악을 마음에 제하여 버리기 위하여 살을 에는듯한 피땀눈물 눈물의 노력 곧 십자가의 고난을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겪으며 인내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이 임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이며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신 것임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