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누가복음 11장42절에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에서 "십일조(十一條)"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십일조" 의 가장 처음 시작은 창세기 4장3~5절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하고 쓰고 있듯이 아담의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은 각각 농사꾼이요 양치기로서 하나님께 나아올 때에 각기 땅의 소산과 양의 첫 새끼를 희생 제물 즉 오늘날로 치면 십일조 헌금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그러나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으니 그 이유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여 선(善)으로 행하지 못하고서 그 동생 아벨을 시기하며 분내어 안색이 변하였기 때문이며 이를 요일3:11~12절에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찌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하시는 것처럼 "가인" 이 그 마음만 잘 다스려서 동생 "아벨" 을 헤아려 이해하고 존중하며 관용으로 배려하고 양보하는 사랑으로 행할 줄 알았다면 악한 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 희생 제물도 하나님께서 받으셨을 것이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 사람의 "사랑으로 행하는 마음" 즉 마음의 일부분을 받고자 하시는 것이며 다만 희생 제물은 마음의 일부분에서 나온 성의(誠意)의 표시에 불과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聖靈)이신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제물이나 예물을 원하고 바라실까? 하는 것으로써 사람이 사람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하시려고 우리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그래서 누가복음 11장39~41절에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하고 쓰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넣어 생령(창2:7)이 되게 하신 것은 사람의 육신(몸)을 지으신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 속에 있는 마음과 그리고 마음이 감싸고 있는 영혼 즉 심령(슥12:1)을 지으신 것은 그저 자신의 배(이익,유익,욕심)를 위하여 물고 뜯고 싸우는 사나운 맹수와 같은 짐승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심이며 탐욕과 악독을 버리며 체면과 자존심은 내려 놓고 서로가 서로를 섬길 줄 아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 그렇지 않다면 서슬퍼런 이빨을 드러내는 짐승과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즉 누가복음 18장10~14절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는 것처럼 이 세상에 미우면 미워하고 뜻대로 안되면 분노하며 마음에 안들면 비방하고 못마땅하면 사나워져서 다투고 함부로하는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임을, 악인임을 인지할 줄 알고 자각할 줄 알아서 그 행위를 고쳐서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자기를 낮출 줄 아는 것이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만일 그 행위를 고쳐서 처음부터 이르신 "사랑(갈5:14~15)" 으로 행하지 못한다면 "가인" 과 같은 "악한 자" 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7장11절에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하고 쓰고 있듯이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 이라 함은 율법을 따라 난 제사장을 말함이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 을 주신 것은 사람이 자꾸만 죄를 범하기(갈3:19) 때문에 그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여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제사(예배)와 제물(헌금)을 드리는 예법과 예식을 기록하신 말씀으로써 우리가 여전히 죄에게 얽매이고 악에게 포로되어 행하고 있다면 아직도 "율법 아래" 에 있는 것이며 중요한 것은 예법과 예식은 형식에 불과하여서 예배를 드렸다고 하여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질적이고 본질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 반드시 필요하며 또한 그 율법 아래에서 얻은 제사 직분은 레위 계통의 아론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목사,신부)들이니 히브리서 5장1~3절에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시는 것처럼 그 제사장(목사,신부) 역시 허물 많고 실수 많고 잘못이 많은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 사람과 똑같기 때문에 누가 누구의 죄를 사하여 줄 수 있으며 안수하고 축복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써 오직 아들이시라도 죄를 다스리고 절제하고 제어하려고 노력하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명(약2:8~9)을 지켜 행할 줄 아는(히10:7~9)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라야 중보자로서, 대언자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죄 사함을 얻을 수 없으리니 오히려 히브리서 7장5~6절에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 하고 쓰고 있듯이 우리에게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신다고 하시는 약속이 남아 있고 그전에는 율법 아래에 있는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백성(성도,자녀)들에게서 취할 수 있었겠지만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 중에 레위의 아들들 곧 아론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들도 포함이 되어 있으니 그들 역시 마음의 일부분 즉 죄대로 악대로 행하던 죄됨과 악함에서 떠나고 벗어나서 지켜 행하라고 주신 생명의 계명(눅10:25~28)대로 지켜 행하지 못한다면 그 할아버지라고 할지라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요일3:14~15)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