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레미야 2장27절에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비라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은 내게로 향치 아니하다가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라." 에서 "등을 내게로 향하다."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인즉은 말로는 입으로는 혀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배경 곧 재력이나 학력이나 지위(위치), 하다못해 나이가 많은 것으로, 성별의 우월성과 같은 체면과 자존심을 의지하여 자신감이나 자존감을 세우다가 막상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일(질병,사고,재해)에 맞닥뜨리거나 마음이 허락할 수 없는 문제(실패,고통,슬픔... 등등등)가 생기게 되면 그 때에서야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찾는 우리 사람의 모습(자세)을 거울처럼 보여주신 말씀으로써 이러한 것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나무나 돌이며 이는 사람을 지으신, 만물을 지으신 조물주 아니 그에 앞서 부모님(사1:2~4)과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배신, 배반,배도(살후2:3)" 즉 신뢰를 져버린다는 의미이며 이러한 모습은 아담의 때에도, 노아의 때에도, 아브라함의 때에도, 모세의 때에도, 2000년 예수의 때에도, 오늘날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다 똑같기 때문에 어느 때 어느 시대 어느 세대에서도 다 있었으므로 새삼스러울 일도, 뭐 놀라울 일도 아니지만 다만 첨단을 달리는 4차산업의 시대에, 발빠르게 변화되고 바뀌고 있는 세대에 하나님을 잘 몰라 안믿고 못믿는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실질적으로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 역시 아무런 생명도 기식도 없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돌이나 나무나 또 다른 형태의 신(神)들을 만들고 모시고 섬기기도 하니 우리 사람만은 여전히 이러저러한 구태의연한 구시대의 구습(엡4:19~24)을 버리지 못하고 비우지 못하고 죽이지 못하고 바뀌지 않는 것이 마음 아프고 안타까울 뿐..... 호세아 6장4~7절에 "에브라임(북이스라엘)아 유다(남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만물의 영장(靈長)인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물, 모든 만물이 생기 즉 살아가게 하는, 살게하는 원동력은 오직 "사랑(요일3:11)" 에 있고 하나님 역시 사람을 그렇게 지으셨고 또 그렇게 양육하셨으며 이것 자체가 곧 "하나님" 이시지만 우리 사람은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고 싶은 욕심을 인하여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변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인애(어진 마음으로 상대방을 사랑함)는 내 유익(입장,처지)과 이익(성공,성취)이 앞에서만 유효하여서 뜻대로 안되고 마음에 안들고 못마땅하고 언짢아지면 아침 구름(안개)처럼, 아침 이슬처럼 쉽게 사라지니 이러고서야 어찌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주여 주여!!" 부르짖을 수 있으며 그 드리는 제사(예배)와 번제(헌금)가 가인(창4:5~7)처럼 무슨 유익과 효력이 있을까?
그래서 시편 78편6~8절에 "후대 곧 후생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 자손에게 일러서 너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 그 열조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은 하나님께 충성치 아니한 세대와 같지 않게 하려 하심이로다." 하시는 것처럼 시편 78편은 모세의 때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 사건을 통하여 후대 곧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신다고 하신 약속이 남아있는 우리들에게 하시는, 던지는 약속의 말씀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고죽고 나고죽고 하면서 430년간 애굽에 종살이를 하며 "하나님" 이라는 신(神)조차 그들의 뇌리에서 점점 없어지고 사라져 갈 때에 모세를 통하여 종살이 탈출을 위하여 홍해를 건너게 하셨고 시내 광야를 지나서 아브라함(창17:7~8)으로부터 하신 영원한 언약(약속)인 쉼과 안식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기를 계획하셨지만 복병은 따로 있었으니 그들은 비록 애굽에서의 법 아래에서 종노릇하는 종살이였지만 그 속에서 얻은 따뜻한 집(재력)도 있고 지위(학력,권위)도 가졌으며 자기들 안에서는 그래도 나이나 경험치를 앞세워서 떵떵(체면,자존심)거리며 마음대로 뜻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었는데 시내 광야로 들어와서 집도 절도 물도 나무도 돈도 없이 다 똑같은 입장이 되고보니 그들의 자신감이나 자존감을 세워 줄 그 무언가가 필요했을 것이며 그것이 애굽 법이 아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 나라의 법 곧 율법과 율법의 계명(신8:1~2)을 의지하여 지켜 행하였더라면 그 고생과 수고로움과 애굽에서의 치욕이나 굴욕을 보상 받는 쉼과 안식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텐데..... 중요한 것은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모양 곧 이상으로, 빗대어 비유하여 에둘러 표현하여 기록하신 말씀이므로 이 또한 곧이곧대로 역사적 사실, 사건으로 다가간다면 아직도 그림자요 껍데기에 불과한 율법(히10:1) 아래에 있는 것이며 초보(일부분)만 가르치는 몽학 선생 아래에 있는 그 성도들에 불과하리니 다시 말해서 우리 사람이 얽매이고 져서 종노릇, 종살이하였던 것은 "죄와 악(롬6:6)" 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종살이가 알고보니 어찌 430년 뿐이었겠는가? 하지만 이를 뛰어넘을 줄, 초월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유월" 이요 유월이 없이는 홍해를 건널 수 없으며 또한 곧바로 쉼을 얻을 수 있도록, 안식(평안,행복,안위)을 취하도록 가나안으로 들이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매마른 광야를 지나가게 하신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비로소 진정 그 마음 속에 담고 있는 것이,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나고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며 우리 자신이 과연 하나님에게 등을 돌려는지, 우리의 등만 늘 하나님께 보였는지 알게되기 때문이니 그러나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요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뭐 어려운 단어도 아니여서 마음과 생각에 있는 "사랑" 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것을 말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외모가 아닌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시므로 우리 역시 사람의 겉모습이 아닌 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속사정(입장,처지)을 살피지 않는다면 한 순간에 집도 절도 물도 나무도 보이지 않는 악하고 독하고 모질고 야멸찬 매마른 광야와 같은 마음만 보이게 되며 그러면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더 독해지고 악해지며 더욱더 모질고 야멸차게 되리니 그러한 우리 자신을 거울처럼 바라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눅10:25~28)은 절대로 지켜 행할 수 없게 되며 또한 시간(세월)만 흘렀을 뿐, 공간(장소)만 바뀌었을 뿐 가나안을 코 앞에 두고 광야에서 다 죽어간 그 때 그 시대 그 세대의 그들처럼 우리도 3000년 전 그 시내 광야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으며 또 비로소 아브라함과 하신 생명으로 들어가서 얻을 쉼과 안식은 결국 우리 시대에 드러나고 나타나서 이루실 영원한 약속(언약) 곧 생명과 안식과 구원의 상징인 가나안(히4:8~9)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0장5~6절에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 11절에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어느 시대,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존중할 수 없고 배려할 수 없고 양보할 수 없는 즉 무조건(마음과 뜻을 다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힘을 다하여), 목에 칼이 들어와도(목숨을 다하여)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남는 것은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비방하고 훼방하고 사나운 맹수처럼 싸우면서 함부로하고 갑질하는 일 뿐이며 이러한 마음은 사람으로 더욱더 독하고 모질게 만들어서 보복하게 되고 복수하게 되고 테러를 하게 되고 전쟁을 하게 되리니 이러한 악순환은 우리 사람이 선(善)으로, 의(義)로 행하기 보다는 죄와 악을 더욱 즐겨 행하였다는 증거이며 이렇게 살다가 죽게(멸망,파멸,사망) 하시려고 사람을, 생물을, 만물을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 아니 어떤 토기장이(롬9:21~24)가 그릇을 깨트려버리기 위하여 만들겠는가? 하는 것으로써 예레미야 2장31~32절에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흑암한 땅이 되었었느냐. 무슨 연고로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않겠다 하느냐. 처녀가 어찌 그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 고운 옷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계수할 수 없거늘~ "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에게 항상 한결같이 처음부터 쉼(평안)과 안식(행복)이 있는 생명의 기운인 "사랑" 을 주셨고 그것으로 살게하는, 살아가는 빛이 되게 하셨지만 우리 사람은 그 날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를 져버리고서 다들 상석(上席)에 앉아서 떠받들어 주기만을, 우러러 봐주기만을 바라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변하여서 행여 마음에 안들고 못마땅해지고 언짢아지면 잘라버리고 꺾어버리고 밟아버리며 물고 뜯고 싸우고 치고 박는 전쟁만을 도모하는 죄와 악을 즐겨하며 생명과 안식과 구원이 아닌 멸망과 파멸과 사망의 제 갈 길로 걸어갔으니 말로는 생명(은 하나님) 곧 불로장생, 무병장수를 외치면서도 정작 그 필요로하는 생명에 대한 노력과 인내로 무엇을 하였는가? 우리 사람이 떳떳하고 자신있게 생명과 안식과 구원을 주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패물과 고운 옷은 죄와 악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곧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롬6:6~11)인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갈3:27)이며 이를 위하여 2000년 전 앞서서 그리스도께서 몸소 실천하여 본보기를 보이신 것이며 이제는 그 본과 자취를 좇아서 지켜 행하는 자들로 광야에서 벗어나 온전하고 완전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려고 두 번째 다시 오시는 것임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