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가복음 9장37절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에서 "영접(迎接)"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먼저 오늘 본문의 말씀에 "어린 아이" 에 관하여 잠깐만 들여다 보자면 "영아(0~6세), 유아(7~12세), 소아청소년(12~18세)" 하는 것처럼 나이가 적어 앳되고 세상물정 모르는 그런 "어린 아이" 를 말하고자 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안다고는 하나 아직은 제대로 잘 몰라 똑바로 못 믿고 있는 즉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부족하고 나약하고 연약하고 취약한 그런 사람을 "어린 아이" 에 빗대어 하신 말씀으로써 고린도전서 9장20~22에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며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고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 하고 쓰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 6000년 전에 하나님께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 행하여야 할 십 계명 곧 "살인, 간음, 거짓말, 도적질, 탐심의 죄악을 범하지 말라. 그리고 서로 거룩하며 섬기며 공경하며 사랑하라." 하시는 계명을 주셨지만 어느 시대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이 계명대로 지켜 행하였던 적이 있었던가? 그러하였다면 이 세상에 악순환의 피를 부르는 보복복수테러전쟁은 없었으리라. 지금도 아직도 여전히 제대로 지켜 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느 누구랄 것 없이 모세의 율법 아래 즉 초보(일부분) 아래에 있다고 선언하고 단정 짓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이유이며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모세의 율법을 온전하고 완전하게 완성하기 위하여 2000년 전에 유대 땅에 오셨고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된 믿음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나약하고 취약한 "어린 아이" 와 같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미워하고 침밷고 때리고 비방하고 업신여겼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똑같이 되어서 치고 박고 물고 헐뜯으며 싸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하신 살인(미움), 간음(두 마음), 거짓말(한 입으로 두 말), 도적질(가스라이팅), 탐심(욕심)의 죄악을 범하여 계명을 또 어기게 되는 것이요 또 피를 부르는 악순환만 반복하게 되기 때문에 그러한 죄되고 악독한 마음을 버리고 비우고 죽이는 "십자가의 고난" 을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것이며 이를 모세의 율법을 완성한 "그리스도의 율법" 이라 하며 이로써 가장 먼저 부활의 첫 열매(고전15:23), 가장 먼저 하나님의 우편에서 안식(골3:1), 구원의 근원(히5:7~9)이 되신 것이니 그러니 이 진리로 자유(요8:32)케 되지 못한다면 여기 초보(일부분)적인 모세의 율법에 있는 제사(예배,헌금)의 규율에 얽매인 줄 모르고 상대방을 미워하고 판단(비난,비판,비방)하게 되며 그래서 저기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우월주의에 빠진 줄 모르고 교회(성당,예배당,성전,사원..등등)에 오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율법 없는 자)을 정죄하고 업신여기게 되니 미워하고 침밷고 비방하고 때리고 업신여기는 "어린 아이" 와 다름없는 유대인들과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한 "어린 아이" 와 같은 유대인들 "영접(迎接)하심" 으로 기꺼이 그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이기 때문에 물론 나이가 적어 정말로 어리고 앳되고 세상물정 모르는 그런 "어린 아이" 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는 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디 톱니바퀴 이빨 하나 빠진듯한, 어디 구멍 하나 난듯한 "어린 아이" 와 같으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스도께서 먼저 앞서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본보기를 보이신 "영접하는 자" 가 되어야 하며 그것이 그리스도를 영접함이요 하나님을 영접함이라는 것임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영접(迎接)" 이라 하심은 기꺼이 환영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맞이하여 주며 오로시 기쁜 마음으로 대접(섬김)하는 것을 의미하여서 그러나 우리 사람은 살아 온 나이(시대적 배경) 만큼, 살아 온 루틴(환경적 배경) 만큼 비례하여 명예와 체면과 자존심을 빼면 시체이고 그것이 또 무슨 벼슬인 양, 상전(임금,사장,주인)인 양 하면서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수족 부리듯이 칼자루를 휘두르고 싶은 욕심(탐심)이 있기는 다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기꺼이 환영하는 마음으로, 오로시 기쁜 마음으로 누군가를 "영접(迎接)"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며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도 앞서서 본보기를 보이신 것처럼 버리고(절제) 비우고(제어) 죽이는(다스림) 저마다의 "십자가의 고난" 을 겪어야만이 비로소 제대로 된, 올바른 완성형의 "영접(迎接)" 을 할 수 있으며 그래야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신 생명(부활)과 안식(쉼)과 구원(구속)의 길을 갈 수 있으리니 그런데 마태복음 25장 43~46절에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고 쓰고 있듯이 "영접(迎接)하는 것"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영벌(둘째 사망)에, 또는 영생(부활)에 들어가는 도화선이 되는 것일까? 하는 것으로써...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당신이 태어나고 자란 지금은 없어지고 사라진 갈대아(바벨론) 우르(오늘날의 이란 이라크 남쪽 국경지역)가 고향인 줄만 알고 살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거기를 떠나 낯설고 물설은 가나안으로 가기를 명하셨고 아브라함은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고민이 왜 없었겠냐마는 그 혈혈단신(사51:2)의 믿음으로 하란(광야)을 거쳐 가나안(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민 즉 들어가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거기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갈, 살아갔을 아브라함을 먹이시고 입히시며 마음이 병들었을 때에 치유하시며 마음 붙여 정착할 집을 허락하셨으며 또한 그러한 하나님을 철떡같이 믿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으로 생육 번성 창대케 하여 이스라엘 민족(후손,자손)을 만들어 주셨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신다는 영원한 언약(창17:8~9)까지 해주셨으니 그러나 그들은 증거(히11:39~40)만 받았을 뿐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실 때에야 마침내 그 약속이 응하고 이루어져서 온전하고 완전한 가나안(히4:8~9)으로 들어가기까지는 이스라엘 민족, 아니 그 할아버지라 할지라도 다 아직은 나그네나 다름 없으며 이는 우리 역시 비록 이 세상에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저마다 고향이 있고 그리 알고 있지만 참 본향(가나안-하나님 나라 천국)이 있음을 이제는 깨달았고 그리 믿고 있다면 다 혈혈단신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벧전3:21)에 서 있는 나그네이기는 어느 누구랄 것 없이 다 마찬가지이므로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 는 적반하장식의 속담도 있는 것처럼 "나그네" 라는 사실을 항상 깨어서 정신 차리고 잊지 않는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환영하여 맞아주며 오로시 기쁘게 대접(섬김)하지 못할 일이 뭬 있는가? 하는 것이며 그러한 저마다의 체면과 자존심만 버리고 비우고 죽여 죄와 악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영생 곧 생명과 안식과 구원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9~13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 "참 빛" 은 단연 질병(염증,암,바이러스..등등)이나 각종 사고(교통사고,살인사고,붕괴사고,전쟁사고..등등)나 재해(홍수,지진,혹한,폭염,각종 인재..등등)로 개죽음을 당하는 재앙과 저주에서 벗어나 생명의 보호하심(잠6:20~22) 가운데서 생명과 안식과 구원에 이르는 것이며 그 방법과 길을 알려주시고 전해주시고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을 몸소 실천하여 본보기를 보이시고 앞서 생명과 안식과 구원으로 들어가셨으며 이제는 그러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 속한 자, 옷 입은 자들을 찾고자 얻고자 하여서 두 번째 다시 오시는 것이며 그런즉 그러한 그리스도를 믿어 기꺼이 환영하는 마음으로 맞아주며 오로시 기쁜 마음으로 대접(섬김)하는 "영접(迎接)" 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러한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 사람 즉 서로가 서로에게 다 같은 동일한 마음 나그네된 자로서 부모처럼, 자식처럼, 형제자매남매처럼, 내 몸처럼 사랑하고 "영접(迎接)" 해야 하리니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 6000년 전 모세(율법)를 통하여 "십 계명" 을 주신 취지요 이유요 목적이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신 율법의 요구이시며 그 요구대로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참 아들들(히2:10)이 되는 것이며 그 취지와 이유와 목적과 요구에는 혈통(세습)이라고 봐주는 것도 없으며 육정(줄 세우고 뒤 봐주고 눈 감아 줌)이라고 무사통과 되는 것도 아니요 사람의 뜻(축복,안수,세례)이라고 절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