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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갇혔으니...

교훈 안에 2025. 1. 24. 16:02

오늘은 예레미야 32장2~3절에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 에서 "에워싸다."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에워싸다, 에워싸이다." 라 하심은 사방팔방으로 둘러싸는, 둘러싸이는 즉 포위당하는 것을 의미하여서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동일한 맥락으로 "사로잡다, 사로잡히다.(렘1:3,암5:5)" 또는 에워싸이고 사로잡혔으니 "갇히다.(사24~22)" 로 표현하여 또 기록하고 있으니...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록하였던 예레미야를 비롯해서 모든 선지자(이사야,에스겔,다니엘,호세아,아모스,스가랴,요엘..등등)들이 활동하던 시대(기원전 500년전,600년전) 자체가 통일 왕국 시대의 마지막 왕 솔로몬 이후에 나라(국가)는 분열 왕국 시대 즉 두 쪽(북이스라엘, 남유다)으로 나뉘어졌고 또 북이스라엘(수도-사마리아)은 앗수르에 의해, 남유다(수도-예루살렘)는 바벨론(갈대아)에 의해 오랜동안(70년) 에워싸이고 사로잡혀서 갇히는 식민지 노예 생활을 하다가 결국엔 멸망(사51:17~19) 당하였던 흑역사를 하나같이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그저 지나간 역사적인 사실사건사고의 지식적인 것들을 알리고자 하여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먼 훗날 언제가 그 때에도 그러할 것, 그렇게 될 것에 관하여 미리 말씀하신 구약 예언서들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왜 어째서 무슨 이유로 에워싸이고 사로잡혀서 갇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며 또한 누가복음 21장20~22절에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며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이 말씀은 4복음서(마24:15~16,막13:14)에서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세상 끝, 마지막 때인 오늘날에도 반드시 있어지는, 일어나는 일이므로 도대체 에워싸이는 것, 사로잡히는 것, 갇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리고 에워싸이고 사로잡히고 갇히는 것은 곧 멸망하고 파멸하고 사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과 안식과 구원을 얻고자 하는 소망과 희망과는 아주 정반대의 길이므로 이보다도 더 큰 낭패가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 어떤 것보다 발 빠르게 백성들(성도들)이 이러한 낭떠러지로 떨어지거나 블랙홀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고 인도해 주고 안내해 줘야 할 지도자들(목사,전도사,선교사,교황,신부님,수녀님,선생..등등)이 현실의 어떤 지위(위치), 지도자로서의 명예와 체면(위력)과 자존심(재력)에 안주하면서 허탄한 것들(갈등,대립,분란,분쟁..등등)만 부추기고 엉뚱한 것들(요행,이생 자랑,현실 축복..등등)만 조장하여 이끌고 있다면 당장에 그 죄에 대한 벌(심판)이 있지 않음을 인하여 곧 닥치게 될 하나님의 엄청난 분노(진노)를 스스로 머리 위에 쌓고 있는 것과 같으니 보았다면, 알았다면, 깨달았다면 이 엄중하고 위중한 하나님의 뜻을 왜 알리거나 전하거나 가르치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으로써 이는 그 착념하고 집착하는 것에 집중하다보니 정작 소중하고 귀중한 것들에는 소경 아닌 소경, 귀머거리 아닌 귀머거리가 되어 눈치도 없고 속도 없는 마음은 빈 껍데기가 되었으므로 이제는 우리 각자각자 스스로(잠6:5)가 찾아 나서야 하며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오늘 이 시간 살펴보고 찾아보고자 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있는 예레미야 32장의 21~24절에 "주께서 징조와 기사와 강한 손과 드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에게 주시기로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바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그들에게 주셨으므로 그들이 들어가서 이를 차지하였거늘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주의 도에 행치 아니하며 무릇 주께서 행하라 명하신 일을 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주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나이다. 보옵소서 이 성을 취하려 하는 자가 와서 흉벽을 쌓았고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인하여 이 성이 이를 치는 갈대아인의 손에 붙인 바 되었으니~ " 하시는 것처럼 시간이 되시면 예레미야 32장 전장을 다 읽어보시면 좋으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의 때보다도 훨씬 더 오래 전 아브라함의 때에 "안식과 쉼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창17:7~9)" 에 관한 영원한 언약(약속,예언)을 하셨고 그로부터 1000년이 흐른 후 모세의 때에야 비로소 애굽에 에워싸이고 사로잡혀서 갇혀 430년간 애굽에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시고 홍해를 건너 시내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으로 들이시고 인도하시는 엄청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으니 하지만 알고보니, 깨닫고 보니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가나안으로 들이시는 명분과 조건 즉 시험(신8:1~2)이 있었으니 바로 하나님의 도(道) 즉 모세를 통하여 주신 "십 계명(죄악-살인,간음,거짓말,도적질,욕심을 버려 행하지 말고 선(善)과 의(義)-거룩,겸손,섬김,공경,사랑을 취하여 이를 행하라." 을 지켜 행하는 일이며 그러나 일주일이면 시내 광야를 벗어나 가나안으로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거리를 그 시대 그 사람들의 유연(유두리)하지 못한 고집(아집,완고,진상)과 거의 생떼 수준의 불평불만과 툭하면 서로 물고 헐뜯고 치고 박고 짓밟아버리고 피(보복복수) 터지는 전쟁의 죄악대로 저항하여 행하기만 하면서 진짜 행하라고 명하여 주신 도(십 계명)는 지켜 행하지 않음을 인하여 결국 광야에서 다 멸망하고 파멸하여 사망하였고 모세(신32:48~52)조차도 가나안을 코 앞에 두고서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에 비추어 볼 때에 철천지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어서 서로 보복복수를 하면서 피 터지는 테러와 전쟁으로 단 하루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없는 지옥 같은 곳이 되어버린 지금 오늘날의 그 가나안(팔레스타인 땅)은 그 가나안이라 말할 수 없는 이유이며 그렇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안식과 쉼의 땅 가나안(히4:8~11)에 관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남겨 두셨으며 또한 그러한 역사적 사실사건사고는 반드시 거울(고전10:6)과 경계(고전10:11)와 교훈(롬15:4)이 되어 그러한 실수나 오류나 혐의는 두 번 다시 반복하여 행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 사람은 "망각의 동물" 하듯이 뒤돌아서면 잊어버리고 흘리고 잃어버리기가 일쑤여서 모세로부터 초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100년 200년도 아닌 1000년이 지나는 동안 다 새까맣게 잊어버려 또 다시 미우면 미워하고 뜻대로 안되면 원망하며 마음에 안들면 비방하고 못마땅하면 함부로하고 언짢으면 짓밟아버리는 죄대로 악대로 행하며 또 그로부터 까마득한 2000년이나 흐른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자세,태도) 역시 시간(세월)만 흘렀을 뿐, 공간(장소)만 바뀌었을 뿐 그 때 그 시대 그 세대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대로라면, 이런 식이라면 멸망하고 파멸하고 사망하는 재앙과 저주를 받는 거지꼴을 면하기 어려우리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반드시 잡아내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에워싸이고 사로잡혀서 갇혀 있는 참 형상(실체,실물,참 뜻)은 다름 아닌 그 마음이 상석(上席)에 있어서 좌지우지 수족 부리듯이 칼자루를 휘두르고 싶어하는 욕심과 또 그러한 욕심을 성취하기 위하여 꼬이고 부정적이고 사나운 심성에서 비롯된 죄악대로 행하는 그 행실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바벨론 군대" 의 참 형상은... 말로는 입으로는 혀로는 분명 "믿습니다. 주여 주여!!" 외치고 부르짖는데 그 마음은 죄악에 에워싸이고 사로잡혀서 갇혀있는, 공중 권세를 잡고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는 악령(惡靈) 곧 사단마귀귀신(요3:8)이라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5장1절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하시면서 21절에 "우준하여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찌어다." 하시는 것처럼 어느 종교, 어느 경서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동일하고 외치며 가르치는 뜻은 오직 "욕심을 버려라, 악독함을 없애라, 착하게 살아라, 사랑(자비,인애,자애,인자..등등)을 실천해라." 하는 것들이며 하지만 우리 사람은 이를 그저 교과서적으로, 그냥 이론적인 수준으로 여기면서 너무나도 가볍게 여기며 보이는 앞에서의 선한 모습과 보이지 않는 뒤에서의 섬뜩한 모습을 동전 앞뒷면과 같이 손바닥 뒤집듯 잘도 뒤집어버리니 멸망하고 파멸하고 사망하는 재앙과 저주는 따 놓은 당상이 분명하며 하지만 롯과 그 가족처럼, 노아와 그 식구처럼, 여호수아와 몇 명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몇 제자처럼 어느 시대에나 다 멸하지는 않으시고 다시 오는 한 시대를 이어가 줄, 다시 시작하는 한 세대를 연결해 줄 그루터기(사6:13)와 같은 공의와 공정과 진리(말과 행동이 일치)를 구하는 거룩한 씨는 시대시대마다 오늘날까지 항상 남겨 두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으로 에워싸고 사로잡아 갇히게 하여 멸망하고 파멸하고 사망하는 재앙과 저주를 받는 일이 목적이 아니라 빨리 깨달아 알아서 돌이켜 고쳐 행할 기회를 주고자 하심이며 그러나 언제까지 또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기회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이 모든 일들을 이제 온전하고 완전하게 완성하여 계획하신 하나님의 모든 뜻을 끝(롬9:28)내시는 때를 위하여 지금까지 참아 인내하여 기다려 주심이시니 바로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시는 때에 살아서 이러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게 될 우리들이기 때문에 비록 말도 못하고 지능도 떨어지는 소나 말과 같은 동물(사1:3~4)들도 제 주인은 알아보는데 우리 사람은 그 좋은 머리로 거짓공갈사기협박조작을 꾀하는 잔꾀, 악한 꾀만 늘어 하나님을 경홀히 여겨 선과 의(이해,존중,배려,양보,겸손,사랑..등등)를 항상 언제나 가르치신 하나님 아버지(부모님)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오히려 버리는 꼴이 되었으니 하지만 오래 참으심은 어찌하든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그 얽매이고 에워싸이고 사로잡혀서 갇여 있는 죄와 악에서 벗어나 죄와 악을 정조준하고 있는 멸망과 파멸과 사망의 재앙과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여 생명과 안식과 구원에 들어가게 하려 하심이며 이것이 진정한 안식과 쉼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라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