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사야 50장8절에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찌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올찌어다." 에서 "의롭다." 할 때의 "의(義)"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의" 에 관하여는 앞서 기재했던 글(2017년4월12일자,2014년9월5일자,14년3월1일자,14년1월27일자) 중에서 살펴 본 적이 있었지만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상식적으로, 통상적으로 지켜야 할 윤리와 도덕 지켜져야 할 도리의 원칙을 "의". "정의", "공의" 라 표현하지만 이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의미이며 또한 이러한 뜻을 알고는 있지만 이대로 교과서적으로 지켜 행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이며 물론 공개적으로 보이는 앞에서나 잘 보여야 하는 곳에서는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이나 정당성이나 합리성이 성립되어 이를 십분, 백분 행하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뒤에서 또는 그리 잘 보일 이유가 없는 곳이나 자신보다 못하고 하찮게, 사소하게 여겨져서 그리 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곳에서는 그 의롭던, 의로움의 모습(자세)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의" 로 행하기 보다는 자신의 유익(입장,처지,상황)이나 이익(기준,관점,기분)이 앞서서 이에 반(反)하거나 마음에 안 들어 못마땅해지고 언짢아지면 불평과 미움과 비방과 사나움과 다툼과 함부로 함으로 행하니 이러한 이중적인 행실(행위,행동)에서 우리의 본 모습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으며 과연 "의" 를 행한다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한다.
오죽하면 로마서 3장10~12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고 쓰고 있듯이 사도 바울이 언급한 이 말씀은 시편 14편의 말씀을 인욛하여 기록하신 것으로써 이렇게 동일한 말씀(베드로후서 3장7절)을 또 다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시대가 바뀌고 문화와 문명이 바뀌어 시간도 많이 흐렀고 공간도 바뀌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거기나 여기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니 다시 말해서 어느 시대,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사람은 한결같이 "이타심(利他心)" 으로 행하기 보다 자신의 유익과 이익에 치우쳐서 행하며 그런 중에 마음에 안 들고 못마땅한 부분에서는 미워하고 불평하고 비방하고 사나워져서 다투고 함부로 하는 불법과 불의와 불공정을 행하게 되니 치우쳐 있기 때문이며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잘 하는 것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할 일이지 이를 두고 "의롭다" , "착하다." 라고 하지 않는 것이며 그런즉 기분이 좋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마음에 들 때에는 의(義)와 선(善)으로 행하다가도 무슨 수가 틀어지고 기분이 좋지 않거나 밉고 싫고 못마땅해질 때에는 못됐고 나쁘고 악하며 부정적이고 사납게 행하는 이런 이중 인격적인 모습은 모든 사람에 다 있으며 이로 인하여 우리가 죄가 있고 그 죄됨으로 하나님께로 매를 맞는 것은 한결같이 "의" 로써 행하지 못하고 마음이 변하여 죄와 악을 행하기 때문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말씀하여 기록하신 것임을 잡안 내셨으면 한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22~24절에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신(요한일서 3장5절) 분이지만 우리 사람과 똑같은 죄가 있는 사람의 모양(빌립보서 2장7~8절)으로 오셨으며 그러나 죄를 범치 않으시려, 궤사를 없애려 그 입에 재갈을 물려서 잠잠하였으니 이렇듯 묵묵히, 잠잠히 있으면 사람들은 오히려 얍잡아 보거나 한찮게 보고나 아래로 보고서 더욱 미워하고 비방하고 훼방하며 사나워져서 다투고 윽박지르고 함부로하게 되니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받은 비방과 미움과 침밷음과 희롱과 모욕과 때림과 멸시가 그것이며 이렇듯 욕을 받으시며 많은 핍박의 고난을 받으셨지만 똑같이 되어서 욕하고 싸우고 위협한 것이 아니라 겉사람은 부단히 낮추시며 하나님의 의(義)를 행하시려 애쓰며 힘쓰고 속사람은 하나님께 하소연(기도,눈물,통곡,애통)하시면서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부탁하시고 기꺼이 죽으심으로 나아가셨으니 이는 우리 사람(인생)의 많고 많은 그 죄됨을 보게 하려 하심이며 보았다면 이제는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의에 대하여 살려 할 하심이니 누가 그런다고 똑같이 되어서 불법과 불공정과 불의로 행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육체의 정욕을 버리려 비우려 죽이려 다른 사람과 싸우고 다투지 말고 우리 속사람과 싸워서 이기기를 바라고 원하시므로 본과 자취(21절)를 좇아서 따라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이사야 59장2절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 17~18절에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하고 쓰고 있듯이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그리스도께서 앞서서 의(義)로 호심경을 삼으며 전신갑주를 입기 위하여 죽기까지 힘쓰며 애쓰신 것을 우리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본 바요 아는 바요 읽은 바이며 앞서서 이러한 본과 자취 즉 표적과 이정표와 롤모델을 보여 주셨으니 참으로 믿는다면, 의지한다면 안으로나 밖으로나 보이나 안 보이나 앞에서나 뒤에서나 변함없이 한결같이 하나님 의(義)로 행하려 애쓰며 노력(훈련,연습)하여야 하리니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의를 향하여 달리신 그 수고와 고생이 그래야 헛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