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사야 51장4절에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발할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에서 "율법(律法)"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율법" 에 관하여는 앞서 기재했던 글 중에서 몇차례 살펴 본(2015년6월22일자,15년5월29일자,15년4월23일자,2014년1월11일자) 적이 있었지만.....
"율법" 은 사람이 살아가는 곳, 모여있는 곳이라면 그 곳이 어디라 할지라도 지켜야 할, 지켜져야 할 규범 또는 법률이 있기 마련이며 이를 통틀어 "율법" 이라 하며 여기에서 한 걸음더 들어가서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에서의 "율법" 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택한 백성 즉 그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율법 가운데서 살게하려(갈라디아서 3장12절) 하여 이 율법을 주신 것으로써 다시 말해서 사람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그것이 믿는 사람이든, 하나님을 잘 몰라 안 믿고 못 믿는 저 세상사람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곳은 다 마찬가지이고 마음에 있는 최소한 한 가닥 욕심이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욕심이 여러가지 재앙 곧 사납게 다투고 시기하고 훼방하며 미워하고 욱하여 윽박지르고 비방하며 함부로하기를 아무런 가책이 없이 서슴치 않고 행하며 더 나아가서 보복과 복수 심리가 결국엔 전쟁과 테러로 이어지는 범법함(갈라디아서 3장19절)을 인하여 더하여 주신 것이니 그러나 디모데전서 1장7~8절에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하고 쓰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인생)에게 그 주신 율법으로 더는 못됐고 나쁘고 악한 꾀를 내지 않으며 죄를 행하지 않았다면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부활)에 이를 수 있었겠지만 우리 사람은 자신이 먼저 앞서서 솔선수범하여 행동(행실,행위)으로 옮겨 행하기 보다는 말이 먼저 앞서고 입으로, 혀로 내밷어 선생이 되기를 즐겨하며 지켜 행하는 것보다 더욱 좋아하였으니 이는 결국 율법의 확증하는 바를 제대로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며 말이 앞서기 보다 혀에는 재갈을 물리고 입에는 지퍼를 채워서 잠잠하되 행실(로마서 2장13절)로써 언변을 대신하고 말보다 언저 앞선 행동이 말을 대변할 수 있어야 진정 율법을 법 있게 쓰므로 온전한 자라 할 수 있다는 것임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그래서 로마서 7장7~8절에 "~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하는 것처럼 율법을 알지 못하였다면 우리가 지금 죄를 짓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으며 율법을 통하여 범법함을 알고 가책을 느끼기도 하며 거리끼기도 하게 되리니.....
그러나 율법에 저촉되는 줄 알고 위법이요 불법인줄 알면서도 지금 당장 징계나 심판(재판)이 없음으로 인하여 한 번 하기가 어렵지 두 번, 세 번이 "밥먹듯이" 가 되어서 본의아니게 그와 같은 것을 자꾸만 행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 곧 정신 세계가 대대손손 우리의 부모가, 우리의 부모의 부모가, 그 부모의 부모가 그와같이 행하여 왔기 때문에 그러한 악습(惡習)과 구습(舊習)이 마치 마치 유전인자처럼 몸과 마음에 박혀서 늘 행하여 왔던 것처럼, 몸에 배어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것이며 14~15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하고 쓰고 있듯이 여기에서 "육신(肉身)" 이라 하심은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고 싶어하는 육체의 욕심대로 행하는 "정욕" 을 뜻하며 우리 육신의 정욕은 선한 것을 좇아 행하려고 하기보다는 못됐고 나쁘고 악한 죄를 좇아서 행하는데 손과 발이 먼저 나가고 빨랐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몸 따로, 마음 따로 움직이는 것이며 그런즉 우리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다고 하나 정적 육신에, 육체에 속하여 있어서 신령한 것(에베소서 1장3절)에 거하여 있지도 못하였거니와 신의 성품을 닮아있지도 못하였으니 무엇보다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정욕을 버리고 비우고 죽이려 부단히 애쓰며 노력(훈련,연습)하여야 율법의 선함이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4장1~2절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하시면서 11절에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하는 것처럼 우리 사람(인생)이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일(문제,상황)이나 어떠한 사연이나 처지나 무슨 입장에 있어서 서로가 사나워져서 다툼이 생기고 그 다툼으로 인한 보복(복수)이 생기며 비방(흉보고 욕함)하고 훼방(잘못되기를 바람)하고 때로는 폭력이 오가며 함부로(무시,멸시,업신여김)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잣대(기준,관점,철학,신념,성향,기분... 등등등)에 비추었을 때에 상대편의 하는 일이나 모양새가 마음에 안 들어서 못마땅해지고 언짢아지기 때문이니 그러나 이러한 모습(자세)은 마치 재판관이나 심판자가 되어서 판단하여 죄를 묻는 것과 같고 그에 상응하는 나름의 벌을 주는 것과 같아서 우리 사람은 판단(비판)하고 재판하는 심판자가 아니라 남(다른사람,상대편)이 무엇을 하든 우리자신은 오직 지켜 행하여야 할 의무와 사명만 있는 율법의 준행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며 그리고 준행함에 있어서 못됐고 나쁘고 악한 꾀와 죄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여 "서로 사랑하라." 하신 율법의 최고한 계명과 같이 온유하고 인애(자비,긍휼)롭게 관용으로 용납(용서)할 줄 알아서 그 위치하고 있는 곳이 어디가 되었건 화평(평강,화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양보할 줄 아는 자가 되려고 힘쓰며 노력(훈련,연습)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온전하고도 완전한 율법에 서는 자가 되며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기록하고 있듯이 마침내 진정한 하나님의 공의로써 만민의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