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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누가복음 19장42절)

교훈 안에 2023. 4. 18. 17:19

오늘은 누가복음 19장42절에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에서 "평화(平和)"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평화(平和)" 라 하심은 이런저런 갈등이나 다툼, 대립이나 분쟁이 없이 화목하고 화기애애하며 평강하고 화평한 상태를 의미하며 그러나 이 세상에 "사랑과 평화" 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전히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미움과 원망이 뒤섞인 보복과 복수와 테러와 전쟁은 끊임이 없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 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며 이는 머리(지식)로는 무슨 뜻인지 알고 있어도 마음(지혜)으로는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온전히 깨닫지 못함을 인하여 말과 행동(행실)으로까지는 옮겨 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꼬집은 말씀이며 또한 이제는 깨닫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마치 숨기고 감춘 것 같이 되었던 때가 아니라 밝히(요16:25) 이르고 알리는 때이므로 사도행전 17장30~31절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교과서적으로만 알고 있고 깨닫지 못한다면 절대로 행동으로까지 옮겨 행할 수 는 없는 것이 "사랑과 평화" 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잘 몰라 안 믿고 못 믿는 세상 사람들이나 매일반이요 매한가지일 수 밖에 없었고 교회(성당,성전)를 다니는 사람들이나 "교회 교" 자도 모르는 사람들이나 교회(성당,성전) 다닌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똑같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이 한 편의 드라마나 영화처럼 손과 발에 못이 박혀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며 서서히 죽어가는 안타깝고 눈물 흘러나는 그러한 감정에 호소하는 믿음이 아니라 죄의 몸(손과 발)을 멸하여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으며 죄에 대하여 단 번에 죽는 그러한 "십자가의 죽으심(롬6:6~11)" 이라는 것을 밝히 이르시고 알려주셨으니 이제는 돌이켜서 고쳐 행하는 것(회개)이 우리 믿는 자들이 안믿고 못믿는 사람들과 구별되고 구분될 수 있는 증거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행하실 공정하고 공의로운 심판이 되리니.....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근본적으로 개개인 각자각자의 마음의 평화, 즉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언제나 어디서나 꼬이고 부정적이고 사나운 심성 되어서 불평불만이 생기게 되고 그 불평불만은 또 갈등과 다툼을 야기하게 되며 갈등과 다툼은 서로 대립하고 분쟁하게 되어서 결국에는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비방(흉보고 욕함)하고 훼방(보복,복수)하고 함부로하고 갑질하는 죄와 악을 행하게 되는 악순환을 유발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마음의 평화와 여유를 찾아서 얻어야 하는 것이 "평화(平和)" 의 핵심 과제요 우리가 열심과 충성으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그래서 로마서 12장16~18절에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하시는 것처럼 이 세상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평강,화목)하는 것이 좋은 것임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술이 나고 심통이 나서 꼬장을 부리며 다그치면서 함부로(무시,업신여김)하고 갑집하게 되고 결국엔 서로가 서로에게 고성이 오가면서 싸움(갈등,대립,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이나 힘 즉 재력이나 학력이나 지위(위치)나 하다못해 나이가 많은 것으로, 성별의 우월성을 앞세워서 체면과 자존심을 세우기 때문이요 이것이 높은 데(상석)에 마음을 두는 것이며 또한 우리 사람는 누구랄 것이 없이 다 부족하고 취약하여서 허물이 많기는, 실수가 많기는, 잘못이 많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같은 마음으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은 마치 허물이나 실수나 잘못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포장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인지상정(人之常情)" 의 서로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 중요하리니 "평화(平和)" 에 관하여 머리의 지식이 아닌 삶에서 반드시 적용되어야 할 지혜로써 "평화(平和)" 를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 그 방법을 알았다면(깨달았다면) 서로 물고 뜯고 다투고 싸우고 보복하고 복수하며 테러와 전쟁은 없었을 것이라. 이는 스스로 지혜 있는 척을 한 것이므로 이러한 죄되고 악한 것을 의롭고 선한 것으로 바꾸어서 행할 줄 아는 것이 "평화(平和)" 의 첫 걸음이며 그제서야 아수라장이 아닌 그 있는 곳이 하나님 나라 천국이 되리니 지금 바로 이 시간 이 곳이 천국이 되지 못하면서 천국에 갈 것을, 구원을 받을 것을 믿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어불성설(語不成說)" 이요 또한 예레미야 9장6~8절에 "네 처소는 궤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궤휼로 인하여 나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는 해를 도모하는도다." 하고 쓰고 있듯이 우리 사람은 하루에도 몇 번은 그 마음이 기분(입장,처지,기준)에 따라서 왔다갔다, 오락가락, 이랬다저랬다 하는 궤휼 가운데 있기 때문에 뜻대로 안되면 상대방을 헤아려 이해하기 보다는 미워하고 분노하게 되며 마음에 안들면 상대방을 존중하기 보다는 비방하고 훼방(보복,복수)하게 되며 못마땅해지면 배려하고 양보하기 보다는 함부로하고 갑질하는 죄와 악을 행하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마음 중심을 품고 있으면서 어찌 말로는 입으로는 혀로는 "사랑해야지!", "평화(평강,화목)해야지!" 하는 덕담이나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써 절대로 말에 있지 않으니 말로는 누가 못하겠는가? 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호4:6) 곧 그 마음에 지혜에 없음을 인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며 또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임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시면서 7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하시는 것처럼 우리 사람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누구랄 것 없이 미우면 미워하고 뜻대로 안되면 분노하고 마음에 안들면 비방(흉보고 욕함)하고 못마땅해지면 함부로하고 언짢아지면 갑질하는 죄악을 범하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웃 즉 집에서는 가족, 학교에서는 친구, 직장에서는 동료, 지인... 등등등 상대방에게 때로는 비수를 꽂기도 하고 송곳으로 찌르기도 하며 등을 치기도 하고 발등을 찍기도 하는 그러한 허물과 실수와 잘못이 많기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찔리고 상함에 관한 말씀이 어찌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국한된 말씀일까? 다만 그리스도와 우리 사람의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똑같이 되갚아 주려고 하며 아니면 더 큰 목소리나 더 큰 앙갚음으로 보복하고 복수를 하려하기 때문에 평화롭고 화목하고 화기애애하기 보다는 고성이 오가는 물고 뜯고 다투고 싸우는 갈등과 대립과 분쟁이 있게 되는 것이므로 누군가는 이러한 곤욕과 괴로움을 당할지라도 입(말)으로 범죄치 않으려고 잠잠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며 몸(행동)으로 범죄치 않으려고 묵묵히 견딜 줄 아는 사람도 필요한 것이며 이러한 상황을 참고 견디려 함에 있어서는 그 당시에는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듯한 두려움이나 긴장감도 있겠지만 사람을 보지 말고 그 죄된 말이나 악한 행실에 맞서서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으려는, 죄에 대하여 죽으려는 희생 곧 "십자가의 죽으심" 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하며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앞서서 몸소 실천하여 본보기를 보이신 이유와 목적이며 이로써 부활에 참예하시고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이며 이제는 그러한 그리스도와 같은(동일한) 마음이 되어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고전15:23), 속한 자(계14:5), 옷 입은 자(갈3:27)를 찾고자 얻고자 하여서 두 번째 다시 오시는 것임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