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사야 64장7절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다." 에서 "죄악(罪惡)"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에서의 "죄악" 이라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정직하게(전도서 7장29절) 지으셨고 그 심령(스가랴서 12장1절)속에 참되고 온전한 천지(天地)의 이치 즉 하나님의 신성(神性)을 담기를 원하셨지만 호세아 6장7절에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하고 쓰고 있듯이 아담으로부터 비롯되어 모든 사람에게까지 이른 하나님께 대한 "패역(悖逆)" 을 행하였으며 그 패역은 생명나무 실과가 아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창세기 3장6~7절)으로 말미암아 "벌거벗은 것" 이며 중요한 것은 사람이 "선(善)" 도 알고 "악(惡)" 도 알게 되었지만 벌거벗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아닌 욕심(탐욕)을 좇아가게 되었고 그 욕심이 사람으로 원하는 바 "선(善)" 은 행하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원치 않는 "악(로마서 7장19절)" 을 행하게 하기 때문에 그런즉 사람을 "선하다." 고 하는 것이 맞을까? "악하다." 고 말해야 맞을까?..... 하는 것이니 이것이 하나님 앞에 "죄악" 이며 이 벌거벗어 무화과 잎(창세기 3장7절)으로 몸을 가리고 벌거벗음으로 말미암아 입게 된 가죽옷(창세기 3장21절)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옷(로마서 13장14절)입게 하기 위하여, 옷 입어 죄악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생명나무(요한복음 15장1절,11장25절)이신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 유대땅에 오셨던 것이며 그러나 지금도 아직도 여전히 우리 사람은 죄악 가운데서 행하여 2000년 전 그 때나 지금이나, 거기나 여기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음으로 하여 이 모든 것은 온전히 이루시기 위하여 두 번째 다시 오시는(임하시는) 것임을 염두에 두셨야 하리니.....
이사야 50장1절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 보냄을 입었느니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지으시고 만드셨을 때에는 헤어지거나 떨어지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거처를 함께(요한복음 14장23절) 하기를, 그 신성(神性)을 닮아 사람을 덧입기(고린도후서 5장1~2절)를 바라신 것이며 하지만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심으로 말미암아 "죄악" 에 팔린 것은 우리 사람이며 또한 그 패역의 허물로 인하여 스스로 떨어져 멀리 나오게 된 것이니 에스겔 14장3절에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하고 쓰고 있듯이 이 세상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神)들도 무수히 많이 있으며 또한 그러한 다른 신(神)을 믿는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이 있지만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말로는 신(神)을 믿으며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생활 속에서, 현실에서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내 입맛대로 칼을 휘두르며 좌지우지 하고 싶어하는 욕심(야고보서 1장14~16절)을 따라 행하는 "자기 자신" 을 다들 믿고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며 더욱이 이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안 믿고 못 믿는 세상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 아니라 그들은 일단 둘째치고라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를 의지한다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자녀,성도)들을 향한, 그들에게 던지는 말씀이라는 것을 잡아 내셨으면 한다.그래서 예레미야애가 4장6절에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경각간에 무너지더니 이제 처녀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중하도다." 하는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 아브라함 훨씬 이전의 노아의 때에 있었던 일로써 이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신다(임하신다)고 약속하신 세상 끝, 마지막 때, 오늘날도 노의 때, 롯의 때(누가복음 17장28~30절)와 같아서 과연 그들이 먹고 마셨던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이 사고 팔고 심고 지었던 집은 어떤 것일까? 죄악을 먹으며 그 패역의 허물을 마신 것이며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베드로후서 3장21절)을 팔아 죄악을 산 것이며 욕심(탐욕)을 심어 죄악으로 그 집(몸과 마음)을 심은 것이니 시간(세월)만 흘렀을 뿐, 공간(위치)만 바뀌었을 뿐 그 때나 지금이나, 거기나 여기나 별반 다른 것이 없고 오히려 더욱 중(重)하여 오직 우리 사람에게 파멸(멸망,패망)과 사망(죽음)의 재앙만이 남았으니 이사야 53장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시면서 7절에 "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하고 쓰고 있듯이 그러한 우리 사람(인생)을 위하여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으로써 다시 말해서 우리 사람은 조금만 기분이 언짢아져도 상대방을 아래로 보고 서로 찌르고 상하게 하며, 좀 마음에 안들어지면 서로 미워하고 비방(흉보고 욕함)하며, 좀만 못마땅해져도 다투고 분노하고 함부로(무시,멸시,업신여김)하기를 서슴치 않는 죄악과 불의와 불법을 행하기에 손과 발과 눈과 입이 빨랐으니 그러한 악한 습관과 못된 버릇은 여지없이 지극히 작은 자(마태복음 25장41~45절)의 모습으로 오셨던 그리스도에게도 예외가 없이 행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였으며 지금 살아있는 우리라고 하여 그들과 결코 다르지 않으니 우리 또한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비방하고 훼방하고 다투고 함부로하고 있기 때문이며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과 똑같이 되어서 싸우고 미워하고 비방하고 때리고 침밷고 함부로하였던 것이 아니라 죄악에서 벗어나는 길(지식), 그 패역에서 나오는 방법(지혜)을 알려주시고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몸소 실천하여 본보기를 보이셨으니 즉 입으로 범죄치 않으려 입에 재갈을 먹여(시편 39편1~2절) 잠잠하였으며 몸(행실)으로 범죄치 않으며 묵묵히 다 맞고 받으셨으며 다만 마음으로 육체의 욕심과 소욕(죄악)을 버리고 비우기 위해 싸우셨으니 십자가의 고난이요 고난으로 말미암아 못 막아 죄악에 대하여 죽으심으로 부활에 참예하신 것이며 그런즉 그리스도를 위하심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 사람의 죄악을 없이하시려고 몸소 본을 보이신 것이기 때문에 말로만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과 자취(베드로전서 2장21절)를 좇아서 우리도 그리 행하여야 그 죽으심이 헛되지 않으며 우리 또한 죄를 없이함 즉 죄 사함(골로새서 1장14~15절)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24~25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 하고 쓰고 있듯이 이 세상에 어느 누가 학력과 재력과 권력을 마다할 사람이 있겠는가? 어느 누가 그러한 성공을 통하여 안위와 행복과 즐거움으로 살고싶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그러한 체면과 자존심이 사람의 마음으로 말석(末席)에 두도록 내버려 두질 않고 상석(上席)에 두려 하게 되며 다른 사람을 아래로 보면서 못마땅할 때, 마음에 안들 때, 언짢게 할 때에 소위 "갑질" 이라고 하는 함부로하게 되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이나 위치(자리,지위)에서도 그 마음을 말석(末席)에 둘 줄 안다면야 더할나위 없겠지만 사람이 그럴 수 없음으로 하여 버리고 비우는 것이 좋으니 오죽하면 "범죄하는 손과 발이 있다면 찍어버리고 범죄하는 눈이 있다면 빼어 내버리라.(마태복음 18장8~9절)" 하셨을까? 범죄의 날, 죄악의 날로 시한부(100년)의 삶보다 죄악을 버리고 비워 영원무궁한 차원의 생명으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